그리고 잠시, 도시락을 쉬어 갑니다.
도시락통이 꽤 많다. 손으로만 꼽아봐도 하나, 둘, 셋...... 대략 여섯 개에서 일곱 개 즈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웃긴 건 여러 가지 도시락통 중에서도 유난히 손에 가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 마치 집에서 입는 편한 옷 중에서도 꼭 몸에 맞아 자주 입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내겐 도시락통도 그렇다. 개중에 유달리 자주 사용하는 녀석이 있다.
작년 생일에 샀던 1단 도시락통이 바로, 그것이다.
도시락 초기, 열정이 넘쳤을 때에는 락앤락 2단, 3단 도시락을 가득가득 채워갔다. 지금보다 거리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요리를 해서 밥, 반찬, 국, 과일까지 싸갔다. 게다가 매일 같이 새로운 메뉴를 고민하며 도시락을 쌌다. 참으로 대단한 시절의 이야기다.
지나친 열정이 도리어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 순간들을 몇 번 겪었다. 소위 말하는 권태기인데, 권태기가 한 번 지나간 후에는 최대한 간편한 도시락을 찾게 됐다. 한 끼를 뚝딱, 해결할 수 있는 죽이나 고구마, 계란 등을 편하게 담을 수 있는. 마침 그때 산 1단 도시락이 어찌나 간편해서 가지고 다니기 편한지. 그러다 보니 쓰던 녀석들만 자주 찾게 된 것이다. 아주 작은 사이즈는 웬만한 백팩에는 전부 들어가서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닐 것도 없었다.
어른이지만 아이 같은 취향에 캐릭터 도시락은 딱이었다. 사실 앨리스를 좋아하진 않지만 일러스트가 예뻐 싸는 맛이 있고, 토토로는 역시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동일 제품 중 가장 귀엽고 앙증맞은 데다 보기보다 양이 넉넉히 들어가 좋았다. 토토로 도시락은 2단 도시락인데 양이 적어 다른 도시락의 1단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아랫칸엔 주먹밥이나 볶음밥을, 위칸에는 반찬이나 과일 등을 나누어 싸가곤 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먹고 나면 무게가 급속도로 가벼워져서 출퇴근용으로 딱이라는 점. 덜그럭 거리는 젓가락 소리나 빈 통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그야말로 콤팩트함에 푹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샀던 도시락 가방은 모두 수납장으로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저 두 도시락 통만 주로 쓰고 있다. 그 안에 간단한 메뉴를 담아 출근한다. 가방 속에 아이패드 하나, 필통 하나, 그리고 도시락과 텀블러를 담으면 출근 준비 끝.
예년보다 가벼워진 가방만큼이나 몸과 마음이 산뜻한 하루하루가 지속되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도시락 생활 9개월 차, 아직도 너무 행복하고 즐겁게 도시락을 싸고 있답니다,라고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참으로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적응력이 너무 떨어지는 개복치 같은 나, 자주 아프다. 며칠 전에도 급성 위염과 두통으로 3일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난 금요일 중요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다른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만 꾸벅꾸벅 조는 나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 몸이 너무 힘들구나.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은 체력이 너무 떨어져 당분간 도시락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주 동안 사실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주먹밥이고, 계란볶음밥이고 나름 돌파구를 찾았지만 완벽한 해답은 되지 못했다. 짧은 시간 안에 냄새도 들키지 않고 코로나도 조심하면서 먹기 위해 꾸역꾸역 넣은 밥은 자꾸 체했고 주변 상황을 너무 신경 쓰는 내 성격은 자꾸 나를 옥죄여 왔다.
원래도 환경이 바뀌면 적어도 1년은 고생하는 사람. 그래서 그 정도가 지나야 겨우 사람들과 말도 제대로 트고 마음을 여는 사람. 바뀐 상황에 적응하려면 일단 가장 품이 많이 드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게 아쉽지만 도시락이다. 당분간은 체력도 보강하고 내 마음도 잘 달래서 충전 좀 하고 다시 시작해야겠다.
호기롭게 1년 치 미급식 신청서를 냈던 열정적인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그새 마음이 변해, 혹은 또 의무감에 도시락을 쌀까 싶어 얼른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돌아오는 4월 한 달은 급식을 먹을 작정이다. 거의 1년 만에 식당으로 향한다. 가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지만 목표는 '회복'이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만약 한 달을 보내도 그래도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 될 때까지 최대한 쉬어볼 작정이다.
도시락을 싸지 않는다고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곳엔 나의 요리 이야기를 계속 적으려고 한다. 어쩌면 '도시락'이라는 틀에 갇혀서 쓰기를 멈췄던 좋은 이야기들이 툭툭 털어져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뭘 하든 중간에 멈추는 것이 누구보다 싫어 몇 번의 담금질을 통해 끝까지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결국 아픔 앞에서 무너져 버렸다.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한혜진 씨가 늘 외쳤던 말이 생각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십분 동감하는 말이지만 난 그 육체를 지배할 정신이 너무 약해진 상태라 일단은 정신도 차리고 육체도 어느 정도 보강하고 나타나는 게 좋겠다.
그래야, 이 일이 다시금 즐거워질 것 같다.
추신: 간편한 도시락을 찾는다면 위의 도시락들을 추천합니다. '스케이터' 브랜드인데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정말 귀여운 도시락이 많이 뜹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