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뭐 먹지?

새 마음으로 도시락 싸기

by 안녕

긴 휴식이 끝났다. 당장 일주일 후로 출근일이 다가오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도시락을 찾는 일이었다. 수납장 한편에서 고이 쉬고 있는 녀석을 꺼내 안을 살펴보니 깨끗하다. 약간 남은 얼룩은 쓱 닦아 내니 새삼 작년 12월이 생각난다. 그 때 나는 무엇을 먹고 살았더라?


드디어, 다시 도시락을 쌀 때가 성큼 다가왔다.




한 달 정도 푹 쉬었다. 솔직히 아픈 기간이 꽤 길어 요양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긴 하지만 어쨌거나 장거리 출퇴근도 잠시 멈추며 살았다.(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신 도시락은 잠시 내려놓고 몸을 다독이는 시간으로 채웠다. 집밥만을 해 먹었다면 요리 실력이 한 뼘은 더 늘었을 텐데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이 시켜먹었다. 아프니까, 힘드니까, 오늘은 다 나았으니까. 하며 수시로 배달을 해 먹고, 사다 먹고 그랬다. 돈은 꽤 들었지만 요리를 잠시 멈추니 나름 편했다. 늘 쫓기던 몸이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다 보니 오히려 몸이 근질근질 해졌다. 뭐라도 해 먹을까 싶어 냉장고를 뒤지고, 재료를 담아 조금씩 요리를 다시 시작했다. 엄청난 열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놓치기 싫었다. 몸이 좀 나아지니 마음이 움직인 셈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마음이 움직인 그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곧 점심 도시락을 다시 싸야 하는 때가 된 것이다. 일정과 마음이 얼추 맞아떨어지니 좋은 점이 많았다. 약간 들뜬 기분은 나름의 활력을 주었다. 내일의 밥상을 그리는 즐거움도 오랜만에 맛보았다. 마침 텅텅 빈 냉장고를 두부, 시금치, 애호박, 돼지고기, 어묵 한 봉지를 넣으며 생각했다. 내일 뭐 먹지?


마침 봄동 레시피를 보고 무친 봄동 겉절이가 있었고, 워낙 좋아하는 무생채가 있었고, 사랑해 마지않는 오뚜기 카레가 있었다. 오랜만에 싸 가는 만큼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면 좋겠다 싶었다. 밥을 새로이 짓는 동안 반찬을 고이 담아 주었다. 카레를 위한 칸은 아예 하나 따로 마련해 주었다. 앞으로 애쓸 일이 많으니 배라도 든든하게 채워주고 싶었다. 그 사이 완성된 밥을 그릇에 담아 한 김 식힌 후 담으니 그럴싸한 한 끼가 완성됐다.


보냉백에 야무지게 담아 냉장고에 넣어둔다. 쉬면서 채워진 마음의 힘도 담아서. 내일부터 시작될 고된 일상에 큰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무언가가 징글징글하게 지겨운 순간이 있다. 좋아 시작했지만 그 마음마저도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 나라고 피해 갈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순간들. 강박적인 데다 원칙주의자인 나는 그런 감정을 갖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늘 극한으로 몰곤 했다.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일로 만들면서 얼마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하는 일은 좋을 때까지만 해도 된다. 매일까지 해야 하는 도시락 싸기는 그런 유연함이 더 필요하다. 힘들어 죽겠는데 꾸역꾸역 싸는 밥은 맛도 더 없다. 그 안에 내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는 억지로 버티며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는 잠깐 멈추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도시락을 싸면서 체감한 것이다. 매번 성공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늘 유념하고 있다.


후우.

크게 숨 한 번 내 쉰다.

한 달 동안 숨 고르며 다독이며 채워 둔 마음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도 무사히, 잘, 그리고 즐겁게 싸 보자.

다시, 도시락 메뉴를 장전하고, 배에 힘 딱 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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