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는 완벽해

도시락 메뉴 1번 자리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by 안녕

도시락 메뉴 중 가장 많이 싸갔던 메뉴가 뭘까? 요리 초보가 반년 넘게 도시락을 싸면서 가장 많이 담았던 반찬과 밥은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름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던 터라 어렵지 않게 메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레, 카레였다.




당근, 호박, 감자, 양파, 버섯, 돼지고기 따위를 적절히 넣고 볶다가 물을 넣고 뭉근히 끓여주고 마지막에 카레 가루를 넣으면 뚝딱 완성되는 카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 카레만 있으면 도시락이 더 맛있게 느껴질 정도인 데다 평소에 잘 안 먹는 야채까지도 알아서 먹을 수 있게 하는 효자 메뉴랄까? 흰 밥에 따끈한 카레를 붓고 살짝 덜 익은 김치를 올려 먹으면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이 미치도록 좋아 매일 같이 어떻게 하면 카레를 먹을 수 있을까 궁리했었다. 다행히 우리 딸은 카레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가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가끔은 내가 먹고 싶다는 이유로, 나중엔 냉장고 야채를 털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자주, 수시로, 카레를 먹어왔다. 당연히 도시락엔 어제 만든 카레가 고이 담겼고 덕분에 도시락통은 늘 노랗게 노랗게 물이 들었다.


입맛은 보수적이라 했던가. 세월이 흐를수록 다양한 카레가 나와 나를 유혹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오뚜기 카레 약간 매운맛'이다. 이상하게 일본식 고체형 카레는 내게 너무 달고(아주 매운맛을 사서 먹어봐도 뒷 맛이 달아 힘들다) 바몬드 카레도 마찬가지인 데다 각종 인도식 카레도 가게가 아닌 이상 집에선 그 맛을 내기 힘들어 손이 가지 않았다. 한 번은 한창 광고하는 제품을 사서 먹어 봤는데 광고와 달리 너무나 부족한 내용물에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나마 차선으로 좋아하는 것은 카레여왕의 구운 마늘과 양파 맛인데 그것도 다른 종류는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아마, 어린 시절 엄마가 한 솥 끓여 주었던 그 카레 맛에 길들여져서 아닐까 싶다. 흰 밥에 슥슥 비벼 한 입 넣었을 때, 쫄깃하고 담백한 고기와 부드럽게 으깨지는 각종 야채, 그리고 목 뒤로 넘긴 후 입 안에 남는 알싸한 매운맛. 그 맛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일요일엔 짜파게티 먹는 날이라지만 우리 집은 일요일에 '카레'를 먹는 집이었다. 짜장보단 카레를 선호했던 엄마 덕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재료, 거기에 너무나도 평범한 오뚜기 카레를 넣어 푹 끓인 그 카레가 너무나 맛이 있어서 특히 더 좋아했던 기억이 많다. 일요일 아침, 디즈니 만화동산의 시작 시간에 맞춰 일어나 언니와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엄마는 멀지 않은 주방에서 탁탁 탁탁- 경쾌한 칼질 소리를 내며 요리를 하곤 했다.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감자, 당근 따위를 깍둑 썰고 기름에 볶다가 물을 넣고 끓이는 동안 엄마는 꼭 나를 불러 냈다. 그러면 나는 부스스한 머리칼도, 말라 붙은 침도 지우지 않은 채 엄마가 준 대접에 카레 가루를 넣고 물에 개기 시작했다. 다른 요리는 일절 시키지 않던 엄마였지만 이 '작업' 만큼은 꼭 나를 시켰는데 선택받았다는 느낌이 좋아 정성스럽게, 곱게 카렛물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놓쳐버린 만화를 아쉬워하는 동안 엄마는 카레를 듬뿍 담은 그릇 네 개와 김치 몇 개가 놓인 밥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나는 너무 좋아 벌떡 일어나 세상에서 카레 처음 먹는 사람처럼 그렇게 먹었다. 한 그릇도 채 못 먹던 내가 두 그릇을 먹을 정도로 카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릇이 투박해도 좋았고 생수가 아닌 보릿물을 먹어도 좋았고 하루 두 끼를 연이어 먹어도 물리지 않았으니까. 시험을 잘 본 날, 상을 탄 날에도 먹고 싶은 음식 중 하나는 꼭 카레였으니까.


아마 그 시절 엄마의 카레는 내 몸 어딘가에 강하게 박혀버린 것 같다. 나이가 마흔이 되어 가도록 그 맛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몇 년 전 그리움에 못 이겨 카레를 만들던 날, 분명 같은 재료인데도 맛이 달라 충격적이었다. 설명서대로 해도,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봐서 해도 그 맛이 나질 않았다. 분명 손맛이 있는 거라면 왜 내 손맛은 엄마의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지 못했나 슬퍼지기까지 했다. 그런 날이면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엄마의 몸엔 '이 때다' 싶은 순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의 몸엔 '센서'가 있어서 적절한 타이밍에 불을 끄고 물을 넣고 간을 보는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 쉽다는 카레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 수가 있는 거냐고 한숨도 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좋아하는 메뉴라 포기하지 않고 만들다 보니 도시락 메뉴엔 자연히 카레가 자주 등장하게 됐다. 다양하게 시도해보면서 조금씩 방법도 재료도 바꾸어 보면서 언젠간 엄마의 맛에 닿을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다 보면 나도 엄마처럼 나만의 '타이밍'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가장 좋아하는 메뉴에 과거와 현재를 담아 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 않을까.


아직은 부족한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카레'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카레는 도시락 메뉴 1번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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