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소통
아주 미안한 이야기지만 윤수와의 처음 만남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녀석은 아주 공부를 잘하는 녀석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운동을 아주 잘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엄청나게 잘 생겨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온 교무실에 소문이 날 정도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보다 작은 키, 동그랗고 까무잡잡한 얼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저 평범한 남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실은 그마저도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수업 시간에 몇 번 만나기야 했겠지만 그렇게 주목받는 편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에게 국어란 그저...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당시의 내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가장 컸다. 타지에서의 자취 4년 차, 작디작은 고시원에서 2년 반을 살다 큰맘 먹고 이사한 원룸에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던 날, 새벽녘에 도어록을 열고자 비밀번호를 누르던 낯선 이의 방문이 있던 날.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인터폰에 밖을 볼 수 있는 모니터 화면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계약 전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나를 탓했다. 어쩔 수 없이 2년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특히 어느 날, 갑자기 늦은 밤 묵직한 발자국 소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옆에 있는 완강기를 밟고 뛰어내리겠다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당시 내 방이, 8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채우는 것은 안정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고시원보다 10배는 넓은 방이었지만 마음은 갈수록 공허했다. 허전해진 마음을 채우는 방법은 무언가를 아주 많이 먹거나,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뿐이었다. 늦은 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식을 잔뜩 사 먹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면서도 집에 일을 싸 가지고 왔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인데 당시엔 꼭, 필요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년 차의 나는 어딘가 꼬이기 시작했고, 어딘가 무료했고, 어딘가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무기력에 휩싸일 때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하지 않던 학년과, 원하지 않던 업무를 배정받았다. 나는 2학년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3학년 담임이 되었고, 연구부에서 일을 하고 싶었으나 학력관리부에서 가장 힘든 방과 후 업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하나, 나를 위한 존중은 없었다. 그저 일을 잘하는 부품 같은 존재로 취급받는 느낌이었다.
넌, 싫단 소리도 못하잖아.
그래도 넌, 네가 맡은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다 해가지고 올 거잖아.
넌, 애들한테 만큼은 잘해 줄 거잖아?
사춘기를 한 번도 겪지 않은 내가
조금씩 비뚤어지려고 할 때,
어느 순간부터 부쩍, 윤수가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여학생과는 말하고 소통하는 것이 편한데, 남학생과는 어쩐지 어색했다. 상대도 그것을 아는지 게 따로 찾아와 말을 거는 남학생은 없었다. 다른 동기 선생님들은 "쌤 예뻐요~", "쌤 좋아요!"라며 따라다니는 남학생 한 두 명은 꼭 있었는데, 난 정말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윤수의 그런 '살가운' 말들이 버거웠다. 이를테면 이런 식.
"쌤. 뭐 하세요?"
(참고로,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 아마 눈에 바로 보일 것이다.)
혹은
"쌤. 지금 몇 반 수업 가세요?"
(역시나 자기 반 수업 가는 중이다. 국어는 참고로 6교시. 체육 끝나고 난 후.)
아니면
"쌤. 쌤 커피 좋아하세요?"
(앞에 스타벅스 커피가 두어 잔 놓여있다. 눈이 나쁘지 않다면, 볼 수 있는 것들.)
그런 식이었다. 만약, 우리 반 여학생이었다면 혹은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이었다면 바로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을 것 같다. "응~ 쌤 지금 일하지~"라든가, "어!? 너희 반 수업 가는데~ 쌤 마중 나온 거야~? 오~ 감동!"이라든가, 아니면 "완전 좋아하지! 커피!"라든가. 긍정과 호의를 담은 반응을 쏟아냈을 터.
그런데 윤수에겐 어쩐지 어려웠다. 뭐 드라마 '로망스'의 주인공도 아닌데 나는 어쩐지 뚝딱 거렸다. 그냥 간단히 대답만 해주면 될 것을 그때는 그 말조차 설어 더욱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게 대했다. 평소에 하지 않는 말투가, 지금 들어도 상처가 될 말들이 윤수 앞에서는 잘도 튀어나왔다.
일 하는데.
너희 반이잖아! 이 녀석아! ㅡㅡ
그런 거 왜 물어보니?
아마도, 이런 대답들을 마구 쏟아내면 제 풀에 꺾여 그만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윤수는 멈추지 않았다.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그리고 이따금 친구와 찾아온 교무실에서도 끊임없이 내게 질문을 했고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런 관심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자주 잔소리를 했다. 선생님은 네 친구가 아니다, 교무실엔 학생들이 마구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그런 질문들은 개인적인 것이다, 하고.
윤수는 그때마다 아, 죄송해요, 쌤. 하며 너스레를 떨었으나 참으로 꾸준하고 끈질겼다. 지나치다 한 번씩 말을 걸어왔다. 수업 중에 굳이 끼어들어 불편한 말을 건넨 적도 없었다. 쉬는 시간에 아주 잠깐씩, 친구 상담 따라와서 그저 한 번 툭, 하고 물어보고 혼이 나고 사라졌다가, 다시 또 나타나 묻곤 했다.
"쌤, 뭐 하세요?"
그러면 한 '끈기'하는 나는 한 번을 받아 주지 않았다. 꾸준히 툴툴거리며 녀석에게 쓴소리를 했다. 그만해라,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물어보지 마라, 쉬는 시간에 찾아오지 마라.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많이 꼬여 있던 시기다.
억지로 맡은 학급에 쉽지 않은 아이들. 33명 중 3명의 말썽꾸러기가 있고, 그중 한 명은 내가 지도를 하는데 욕을 하며 나갔다. 분명히 여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힘들었다. 아무리 친근하게 다가가도 반응이 크지 않아 실망도 많이 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시 조종례 시간에 우리 반을 들어가는 게 참 많이 힘들었다. 진심으로 다가가도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던 시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지나치게 경계했다.
내가 잘 소통한다 자부하는 여학생들과도 이렇게 힘들진대, 하물며 내가 힘들어하는 남학생과의 소통이라? 말도 안 되는 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상처받기가 싫었다.
미숙하고 어리석은 선생님과 다르게 윤수는 한결같았다. 국어 수업에 집중하며 성적을 꽤 올리기도 했고,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이면 한동안은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다. 허나, 단단하게 잠긴 마음은 독설이 되어 아이에게 꽂혔으리라. 고집세고 성실하며 지독한 나의 마음은 3학년 졸업하는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으니.
수없이 흘려보낸 날 중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그날도, 친한 선생님들과 남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상담을 핑계로 들어온 윤수는 친구가 상담을 하는 동안 의자에 앉아 조잘조잘거리다 내 외장하드에 제 이니셜을 뜻하는 스티커를 붙여도 되느냐 물었다. 평소에 매일 같이 뭐라고 한 게 미안한 마음에 그러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세상 조용히 스티커만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별 것도 아닌, 작디작은 이니셜 스티커를.
한 번은 그런 적도 있다. 겨울 방학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시를 마치고 여유로운 수업 시간에 만들었다며 준 것이 하나 있었다. 네모난 상자에 조명을 넣어 키고 끌 수 있는 물건을 만든 것인데 내 이름과 ♥를 넣은 것이 아닌가. 당장에 오글거린다고, 저리 치우라고, 감히 선생님의 고귀한 이름을 함부로 쓰는 것이냐고 면박을 줄까 하다가, 내년이면 못 볼 녀석이란 생각에 받아 들고 본가에 갔다.
"이게 뭐냐?"라고 묻는 엄마에게
"제자가 직접 만들어 준 선물."이라고 답했더랬다.
귀찮다고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윤수가 진짜 졸업을 하는 날이 되니 마음이 이상했다. 이 아이들을 내년에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많이 났는데 졸업식에선 꾹, 참았다. 어차피 선생이라는 건 매년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또 맞이하는 운명이라며 마음을 다독이던 찰나, 윤수와 그의 친구들이 몇몇 찾아왔다. 쌤과 사진 찍고 싶어 왔다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교무실 앞에서 찰칵,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고마웠던 것 같기도 하다. 진짜 이제 가야겠다고, 나중에 성인이 되면 한 번 쌤 찾아뵙겠다고 하는 윤수, 그리고 그 친구 녀석들에게 악수 한 번씩 권하고 아이들을 떠나보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녀석들은 지금 이십 대 중반이 되었고
담임도 아니었던 나는 졸업 후 단 한 통의 연락도 받지 못했으며,
성인이 된 후에 찾아온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2015년을 생각하면 (당시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윤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분명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교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수많은 지적과, 잔소리가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윤수는 '선생님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해야 해.', '너는 그렇게 해야 해.'라고 생각하며 착한 선생님이라는 틀 안에 가둬 숨 막히게 만들었던 나를 해방시켜 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한 번도 뱉어 보지 못한 말, 말투를 녀석에게만큼은 편하게 했으니. 사실은 나도 그런 말 할 줄 알고, 그런 말 뱉을 수 있는 사람인데 꾹꾹 눌러 담아 결국 곰삭고 말아 마음의 병까지 얻었던 나의 굳어버린 얼굴을 조금씩 웃게 해 주었던, 그런 존재.
덕분에 나는 윤수와 소위 티카타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어떤 가식도, 예쁜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힐링이 됐던 것도 같다. 아주 어렴풋이는 남학생과도 이런 '소통'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물론, 한 학기 동안 윤수가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곱씹어 보니, 그건
"선생님, 괜찮으세요?"라는 안부였다.
'쌤, 힘들어 보이세요.'라는 관심이었다.
지금은 나 역시 너스레를 떨며 당연히 괜찮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윤수에 대한 어떤 정보도 내게는 없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연락이 없으면 없는 대로 좋은 것이다. 분명 윤수는 어디에서든지 밝고 맑은 미소로 제 앞의 상대에게 따뜻한 관심을 건네며 누군가에게 제 힘을 나누어 주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럼 나는, 앞으로도 지나온 세월만큼의 시간을 보내며 아직도 잘 쓰고 있는 외장 하드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며 그 시절 미숙했던 나와, 나의 편협한 생각을 조금씩 일깨워준 윤수를 추억하면 될 것이다.
2015년,
나의 설었던,
최초의 소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