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그대에게

너는 나의 진짜_최종_완성_찐_첫 제자

by 안녕

안녕. 유화야. 잘 지내고 있니? 무더운 여름에 건강하게 잘 있는지 궁금하다.

할머니께서는 아직 건강하시지?

아직도 내가 너희 집에 갈 때 과일과 주스를 챙겨주시던 할머니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반갑게 맞이해 주던 너의 모습까지.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문득 네가 생각이 났어. 정말 불현듯 스친 네 모습이 며칠 동안 생생하게 남아 이렇게 글을 쓴다.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네가 나의 첫 제자인 것 같아서. 처음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난 존재니까 너에 대한 기록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각 잡고 쓰기보단 편하게 편지를 쓰고 싶어 띄워 본다. 이 글이 네게 닿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네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때 너는 2007년, 2008년의 너보다 더 행복하길 바라.


선생님은커녕 공무원이란 직업 자체에 뜻이 없던 난 아르바이트로 제일 혐오했던 것이 바로 ‘과외’였어. 가만히 책상에 앉아 과외 학생과 같이 공부하면서 한 달에 30만 원씩 돈을 받는다? 그것도 일주일에 고작 두 번 보면서? 뭔가 사기라고 생각했지. 스스로 가르칠 실력이 있다고 생각도 안 했고. 과외 자리가 들어온 적도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고사하면서 지냈단 말이지.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면서 내게 너를 소개해준 거야. 자기가 하던 과외인데 아이도 너무 착하고 어른들도 좋으신데,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보다는 네가 가르치는 게 좋을 것 같아 추천한다면서. 심지어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라서 ‘국어’를 가르쳐주면 된다는 거 아니겠어? 국어국문학과를 다니는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어. 국어를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도 모르고 대뜸 수락했지.


솔직히 약간 두렵긴 했거든??? 그래도 그 언니가 말하길


“괜찮아. 중2라서 같이 문제집 풀어주고 내신 대비해 주면 돼.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거에 힘을 얻었지.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이라 사실 너와 처음 만났던 수업 장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어떻게 가르쳤는지도 솔직히 생각이 안 나. 그저 네 앞에서 부끄러운 선생님이 되긴 싫어서 공강 시간이나 지하철로 이동하는 틈틈이 수업 준비를 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가. 그리고 네가 가끔가다가 속 이야기를 하면 그저 옆에서 공감하며 들어준 기억뿐이지. 우당탕탕 가르친 기억뿐인데 나와 수업하고 국어 시험을 100점, 혹은 97점씩 받아 오는 널 보면서 많이 뿌듯했던 것 같아.


넌, 항상 나를 ’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불러주던 아이였어. 그리고 다정했지. 처음 본 내게 마음을 주고 너의 속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어. 수업이 끝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어. 한 번은 우리 카페에서 수업한 적도 있었잖아. 던킨 도너츠였던가? 거기서 만나서 공부하고 난 후에 당시 내 남자친구를 만나서 셋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 밖에서 공부한다고 흐트러지지 않았어 우리. 2시간 꽉 채워서 열심히 수업했어. 그래서 부모님께 더 떳떳할 수 있었나 봐.


진로에 대해 한창 고민할 적에 ‘선생님’이 될까 한다고 말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네가 말렸던 기억도 나.


“선생님. 쌤은 과외나 공부방은 잘 어울리시는데 학교는 안 될 것 같아요. 쌤 맨날 울 것 같아요. “라고 말했잖아. 사실 나도 걱정했어. 내가 과연 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근데 그때의 나는 선택지가 없었어. 원래 하려고 했던 방송작가는, 6개월 정도 교육원을 다니며 배우긴 했지만 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거든. 시대를 읽는 힘도,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기도 했고.


한 번은 스승의 날에 나에게 카네이션을 건넨 적이 있었지. 선생님 고맙다면서. 살면서 누군가에게 카네이션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라 너무 얼떨떨했지만 좋은 기분이 더 커서 집에 가져와 한참을 키웠어. 네가 준 카네이션은 피어있던 꽃이 지고 맺혔던 꽃망울에서 새로운 꽃잎이 나고 지고를 반복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지.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과외를 그만두고 난 후에도 카네이션 화분을 보며 힘을 냈던 것 같아. 고마웠어.


우리 한창 과외하던 그 시절에 유행했던 드라마가 뭔지 알아? 바로 “커피 프린스 1호점”이었어. 당시 나는 드라마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사실 끝까지 보진 않았지만 수업 중간중간 공유와 윤은혜의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며 “쌤쌤. 너무 멋있지 않아요?” 하던 너는 기억나. 지금 너는, 주인공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너한테는 한 번 보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드라마 끝까지 보지 않았어. 쌤은 한국판 로맨스가 너무 힘들어. 아마 앞으로도 보진 않을 듯?


너와 함께 했던 그 1~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길고 힘든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었어.

미래에 대한 불안, 어려운 가정 형편, 대학에 대한 불만족, 그리고 뭐 이것저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보낸 일주일 2시간, 한 달에 8번의 시간은 내게 꽤 행복하고 의미 있었던 것 같아.


이제 네 번호도, 네가 살던 집도, 그래서 자주 가던 그 집 앞 편의점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함께 공부하던 그때 그 분위기와 감정은 오롯이 남아있어.


유화야. 우리 언젠가 우연히라도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러면 나는 당시 남자친구가 지금의 남편이 되었고,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줄게. 네 염려처럼 나는 매일 같이 애들을 대하며 울고 있다는 소식까지도.

너는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꼭 이야기해 줘.


나는 그때처럼 네 옆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그 어느 날 2007년 가을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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