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할 사람?

by 안녕

퀴즈 하나, 반장과 부반장 다음으로 학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정답은 바로 서기다. 서기.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출석부를 관리하는 친구다. 매일매일 매 시간 교과 선생님들의 사인을 받아 두어야 하고 담임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통계까지 내야 하는 역할이기에 보통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며 꼼꼼한 아이들이 도맡는다. 학교에 따라서는 서기를 하면 학기별 봉사활동을 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고, 학급 회의를 할 때에는 서기에게 회의록을 기록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 나름 학급 내에서는 위상이 높은 편이다.


그런 서기를 뽑는 자리였다. 그날은.





교사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던 날. 2012년 3월 2일의 일이다.

신규 교사로서 열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날이었다. 잘 다려 입은 정장, 빳빳하게 세워진 셔츠 깃만큼 내 욕심과 열의도 가득 넘치던 날이기도 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 속에는 “우리 딸 파이팅”이라는 메시지가 무언의 힘을 실어 준 날이기도 했고. 발령 후 처음 교단에 서서 들뜬 기분을 애써 누르고 짐짓 어른스러운 말투로 학급 운영에 대해 소개했더랬다.


마침 작년에 반장을 해봤다는 아이가 있어 임시 반장을 시키고, 이제는 서기만 뽑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자, 서기 할 사람?”


이제 막 같은 반이 되어 너무나 어색해 쭈뼛쭈뼛 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던 중에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제가 하고 싶어요.”라며 용기 있게 손을 들어 올린 친구는 다름 아닌 주연이. 우리 2학년 4반에 소속되었으나 사실상 수업은 특수학급(이하 도움반)에서 전부 듣는 도움반 친구였다.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어 정확한 발음이 어려웠음에도 주연이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가. 하. 고. 싶. 어. 요. 서. 기.


순식간에 진지했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아이들은 고요와 적막을 깨고 손을 든 인물이 ‘주연이‘라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동시에 이 상황을 어쩐지 조금 놀리고 싶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갓 열다섯이 된 여학생들에게 주연이는 나와 다르기에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친구라기보다는 나와 다르기에 선을 긋고 다가가고 싶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끔 아이들의 시선과 행동, 그리고 말은 너무나 솔직해서 잔인한 구석이 있다. 그날도 나는 아이들의 눈빛에서 주연이를 향한 묘한 비웃음 순식간에 캐치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시선과 수군거림과 귓속말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풋. 주연이 네가? 서기를?”

“너는 네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서기를 맡아? “

“야야야. 봤어? 주연이가 서기한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헐. 대박.. ㅋㅋㅋㅋㅋㅋㅋ”


녀석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우리 앞에 서있는, 저 앳되보이는 신규 선생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도대체 선생님은 이주연에게 뭐라고 말하며 서기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그때 나는 평생 학교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는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그래. 좋아. 주연이가 서기 하면 되겠네. ^^”


10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그날의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주연이가 서기 하면 되겠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머지 아이들은 수군거림을 멈추고 나와 주연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고 주연이는 결코 잊지 못할 행복한 웃음을 마구 흘려보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웃음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진짜 감사해요. 저 열심히 해볼게요.




실제로 주연이는 서기로서 정말 열심히 활동했다. 도움반에 가서 수업을 들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반 다른 친구에게 출석부를 맡기고 갔지만 그 외에 통합 수업을 들을 때에는 항상 에코백에 출석부를 넣어 들고 다녔다. 꽤 무거운데도 늘 그렇게 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늘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서기라는 역할을 제 스스로 맡아 해내고 있다는 것이 묘한 활력을 주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생각보다 금방 적응했다. 교과 선생님들께서 수업에 들어오셔서 너희반 서기가 누구냐고 물으시면 “주연이에요.”라고 자연스레 답했다. 부족하나마 열심히 노력하는 주연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듯싶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것이고, 주연이는 그 처음을 맞이한 것뿐일 테니.


예상외로 뜨거웠던 것은 선생님들의 반응이었다. 도움반 아이에게 서기를 시키다니? 안 될 것은 없지만 누구도 선뜻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발령받은 첫날, 신규 교사가 해치워 버린 것이다. 뭔가 특별한 사명감이 있거나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만약 그 순간 서기를 하고 싶은 주연이의 마음을 거절한다면 그건 그 아이의 마음에 평생 남을 상처를 주는 것이라는 것과, 그런 일은 교사로서 절대 해선 안 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연이를 가르쳤던 특수반 선생님께서는 내게 전화를 걸어 정말 잘하셨다고, 고맙다고 칭찬해 주셨다. 덕분에 주연이가 학교 생활을 재밌게 하는 것 같다면서. 특히 주연이 부모님께서 담임 선생님께 무척 고마워하신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주셨다. 장애아이를 키우며 학교와 교육청의 무심함에 상처받아 적극적으로 학교에 의견을 피력하고 관철하고자 했던 분들이라 들었었다. 그래서 담임이 피곤할 수 있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런 분들이 내게 한 없이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해 주셨다.


그 일 때문인지 난 주연이 담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과 사소한 일로도 트러블이 생긴 적이 없다. 오히려 이듬해, 나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그 해에 장례식장까지 와서 조문해 주고 가셨다. 그 마음이 감사하고 고맙고 따뜻해 장례식장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온 우리 반 서기 주연이는 5월에 임기를 마치고 다른 아이에게 서기 자리를 물려주었다. 아무래도 매시간 교실 수업에 함께하지 못해 빈틈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셨던 특수 선생님께서 주연이에게 제안하신 것이었다. 주연이 역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 반 서기는 새롭게 선출되었다.




우리 학급에 도움반 아이가 있다고 하면 일단 여러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친구들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소통, 그리고 도움반 선생님과의 협력. 마지막으로 아이와 나와의 라포. 그때나 지금이나 부족하고 미숙하며 빈틈도 많은 나이기에 여전히 담임으로서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문득 햇병아리 신규시절의 나를 추억한다.


망설이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던 나를. 그래서 주연이에게 “그래, 그럼 네가 서기 해.”라고 말하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본다.

그러면 눈치 보고 말 한마디에 험담의 소재가 될까 입을 다물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스리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나를 잠시 멈춰 세운다.


그리고는 말한다.


그때처럼 해. 그래도 돼.

눈치 보지 마. 너 되게 멋진 사람이잖아.


그러면 나는 다시 2012년의 내가 되어 뭐라도 헤쳐나갈 용기를 얻는다.


내가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게 해 준 주연이는 97년생. 이제 스물일곱쯤 되었을 거다. 헤실헤실 웃으며 출석부를 가져오던 녀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 2학년 4반 나의 첫 서기 이주연이 무조건 엄청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만약 내게 출석부를 가져와 싸인해 달라고 하던

2012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웃으며 받아가 이름 대신


“고마워”라고 적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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