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을 아시나요.

by 안녕

어른이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20대가 되면 모두가 자동적으로 어른이 되는 것일까?

아이들 앞에서 무언가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는 나는,

아이들 앞에서 진짜 어른이긴 한 걸까?



가끔, 나보다도 더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아이를 만날 때가 있다. 나도 한 우여곡절 하며 살아온 사람인데 그보다도 더 찐한 인생을 살아온 아이. 그런 아이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늘 나의 추억 속 인물은 나와 함께 독서토론 모임을 했던 '육개장'의 멤버. 성희다.




성희는 150cm를 겨우 넘는 키에 다부진 몸을 지녔다. 동그란 얼굴에 귀여운 안경을 쓰고 항상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눈에 띄는 성격은 아니어서 그저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나 역시 1학기 내내 성희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 조용한 아이. 그 정도가 내가 판단한 내용.


성희와 가까워진 것은 15년 가을, 그러니까 녀석의 중3 막바지이자 내 인생 가장 힘든 시기, 그 중간 어디쯤이다. 당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나는 이러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 것만 같았다. 동료 교사들과 술 한 잔 마시는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작은 자취방에 앉아 밀린 일을 할 때면 도대체 뭘 하는 건가, 하는 회의감만 가득 밀려왔다.


"온전한 내 편이 될 아이들을 꾸려보세요."


선생님이란 직업이 아이들을 상대하기에 에너지를 얻기도 쉽지만 그만큼 뺏기기도 쉽다며 꼭, 온전히 선생님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아이들을 모아보라는 조언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이 영감이 되어 홀린 듯 아이들을 찾아 헤매었다. 어쩌면 내가 살기 위해 그렇게 필사적으로 섭외했는지도 모른다. 독서 모임이 적합했다. 당시 수업을 했던 아이들 중 5명 정도를 뽑아 모임을 꾸렸다.


매주 1회 방과 후에 우리는 책을 읽기로 했고 가벼운 간식도 먹기로 했고, 독서모임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비밀로 하기로 했다. 취향도 성향도 그리고 선호하는 책도 제각각인 여섯 명이 모였다. 모임 이름이 있어야 끈끈해질 것 같아 '육개장'이라고 지었다. 평소 차분하고 성실했던 성희는 그중 한 명이 되었다.


책을 선정하고 구입해서 일주일 간 읽기로 했다. 꼭 끝까지 다 읽은 후 약속한 날에 만나 인상 깊은 구절, 장면, 그리고 소감 등을 자유롭게 나누기로 했다. 책은 각자 사고 간식은 선생님 제공. 우리들의 룰이었다. 처음엔 내가 추천한 책을 읽고, 그 이후엔 각자 원하는 책을 한 권씩 추천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모임은


우리 삶에 온전히 녹아들었다.


<조커와 나>로 시작해 <가면산장 살인사건>,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등을 골라 성심껏 읽었다. 설렁설렁 흘러갈 것 같은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진지해졌다. 아이들은 뭔가 특별한 느낌을 받는 듯했다. 나 역시 그랬다. 평소 아무리 반 아이들이 힘들게 해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왜 그렇게 지각생에게 스트레스를 받는가.) 육개장 멤버들 생각하며 힘을 냈다.


수업 시간에 뜻대로 되지 않아도 각 반에 포진되어 있는 나의 육개장 멤버들을 보며 기운을 얻었다. 그러다 보니 독서 모임에 더욱 애착이 갈 수밖에.


성희는 특히나 열성적이었는데 매주 열심히 책을 읽고 생각할 거리를 가져오곤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진지한 태도에 우리 모두 감동받았던 기억이 있다. 녀석은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아이였던 셈이다.


한 번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라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누가 추천했는지는 모르나 여중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오글거림을 충족시키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나 역시 연애 세포가 죽어가던 차에 소설 속 키스신 등을 보며 므흣하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토론은 뜨거웠다. 연애, 사랑, 남자친구, 그리고 스킨십 등등, 수업 시간에 하지 못할 이야기가 넘나들었다. 성희 역시 쑥스러워하면서도 제 생각을 표현했다. 평소 상상하지 못한 성희의 모습이었지만 그 마저도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듣게 된 성희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친구 사이에 안 좋은 일을 겪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정 내에서 힘든 일을 혼자서 많이 견뎌 냈다. 어떻게 이 작고 여린 아이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성희는 삶의 풍파를 많이 맞아온 아이였다.


녀석의 과거를 듣고 마음속으로 많이 울기도 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여러 상황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내 삶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을 겪어 왔다 생각하니 새삼 녀석이 대단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교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이 많이 아팠더랬다.


그럴 때마다 평소 꿋꿋하게 생활하는 성희가 기특해 뭐라도 더 챙겨준 것 같다. 과자라도, 노트라도, 남는 문제집이나 편지라도 꼭 한 번은 더 살뜰하게 챙겨준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러면 성희는 감사해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라며 연신 마음을 표현했다. 당시 아이들과 비교해도 참 예의 바른 친구. 성희 덕분에 항상 마음의 온도가 1도씩은 상승했다.


입시철이 다가왔다. 성희는 성희대로 나는 나대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육개장 독서모임은 소홀해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상황이 그랬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12월 즈음. 6개월의 짧은 독서모임은 끝이 났고 이듬해 2월, 녀석들은 졸업을 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언제고 연락하자는 다소 상투적인 말을 남기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2017년, 나는 다른 학교로 이동을 하게 됐고 고등학생이 된 성희와의 연락은 아예 끊겼다.


그 사이 나는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다.

아이 보는 일은 자신 있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힘들었고 우울감이 찾아왔다. 당장 눈앞에 아이를 돌보느라 그간 교사로서의 기억은 흐릿해졌다. 특히 15년은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많아 쉬이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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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어느 날,

갑자기,

카톡 한 통이 도착했다.



[저기- 혹시 000중 근무하셨던 00쌤 번호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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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로 등록되지 않아 위험하다는 카톡 경고창 너머 보이는 이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년 만에 닿은 연락.

성희였다.






사진 출처: 농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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