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아이들과 다 행복하게 소통하며 지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섬세하고 꼼꼼한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잘 따라주었지만 어떤 아이들은 깐깐해서 피곤하다면서 나를 무척 질려했다.
'내가 진심을 다해 소통하면 아이가 바뀔 수 있을 거야.'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아이들을 대했지만 남는 건 상처뿐인 관계도 많았다.
"어쩌라고요."
"뭔 상관인데요."
"아, 안 할 건데요?"
"왜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말들은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을 1:1로 대면할 때마다 녀석들의 말들은 내 귀에 깊이 꽂혔다. 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말을 들은 날이면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서 많이도 울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애들 앞에서도 많이 울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상처받은 날엔 애들 앞에서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소리 내어 꺽꺽 울었다.
돌이켜 보니 미숙한 녀석들과 서툰 내가 만나 서로에게 상처만 준 건 아닌가 싶다.
혜정이는 중2, 중3을 연이어 담임으로 만났던 아이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혜정인 정말 천사 같은 아이인데도, 신규교사여서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내게 혜정이의 모든 행동은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일단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집이 걸어서 5분밖에 되지 않는데도 매일 아침 꼭 1,2분씩 지각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을 거칠게 뱉어내곤 했다. 혜정이는 당시 꽤 학년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였고, 주변 친구들도 조금 센 성격이 많다 보니 아이들은 혜정이를 많이 무서워하곤 했다. 나 역시 학교 다닐 때, 소위 말하는 '버스 뒷자리에 앉는 무서운 친구들'을 대하는 게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혜정이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반드시 혜정이를 바꾸리라, 그럴 수 있으리라.
3월 초에는 곧잘 말을 듣던 혜정이는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생활 습관이 많이 무너졌다. 한 번은 3일 정도 학교를 나오지 않아 집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혜정이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면,
"제가 위치 추적 중이니 걱정 마세요. 돈 떨어지면 들어오겠죠."
라고 말했는데 그럼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했다.
"아니, 애가 학교에 안 오는데 왜 이렇게 태평하세요?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라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못했다. 네, 기다려 볼게요. 집에 들어오면 연락부탁 드려요,라는 다소 형식적인 말로 전화를 끊고 나면 그렇게 무기력해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 아이들 방황하는 것이라고 여길 법도 했는데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만 골라서 하는 혜정이를 다루기가 참 힘들었다.
물론 며칠 무단으로 학교를 나오지 않던 혜정이는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지내는 녀석을 보면 참 화가 많이 났다. 답답한 마음에 친했던 선생님들께 혜정이에 대해서 하소연하면 곧잘 돌아오는 대답이 ‘수업 때는 잘 참여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리가 없어, 매일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청소도, 나의 지도도 대충 하려고 하는 녀석이, 심지어 남으라고 하면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리는 그런 모습에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으니 혜정이의 좋은 모습들이 보일리가 없었다.
아마 혜정이도 나를 힘들어했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좋게 보지 않는 선생님, 다른 친구들은 다 좋아하면서도 자신은 어쩐지 미워하는 것 같은 선생님에게 마음 두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은 채, 2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냈다. 중3 때에도 담임이 된 나는, 혜정이와 별 탈 없이 지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내 최선을 다했고, 녀석도 지킬 수 있는 것들은 지키면서.
녀석이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던 날, 졸업식장에서 내가 참 많이 울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졸업장을 주고 앨범을 건네면서 고등학교 가서는 지각도 말고, 친구들과 싸우지도 말고, 부모님과도 잘 지내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말했는지 모른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마음만큼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8년 후인가? 우연히 SNS를 통해서 녀석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됐다.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이상해, 당장에 연락을 해봤다.
예전 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던 혜정이와 카톡을 하니 새삼스러웠다.
다짜고짜 선생님 속을 제일 많이 썩인 것 같아 죄송하다고 말하는 혜정이는 이미 중학교 때의 모습은 사라지고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괜스레 마음이 찡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어린 딸을 키우고 있던 터라 결혼의 세계, 부부의 세계, 육아의 세계로 들어갈 녀석이 뭔가 안쓰러웠다.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하려고 해, 너 너무 아직 어린데, 그냥 좀 놀고 하고 싶은 거 잔뜩 하고 그러다가 결혼해도 안 늦는데,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한창 열심히 사랑하며 미래를 꿈꿀 녀석에게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말을 건네며 커플 머그잔 세트를 하나 보내주었다.
“선생님ㅜㅜㅜㅜㅜ 감사해요ㅜㅜㅜㅜㅜ”라며 답장과 함께 인증숏을 보내온 혜정이의 문자를 끝으로 우리의 연락은 끊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잘 사는지, 시댁 스트레스는 없는지, 결혼생활은 재미있는지, 무슨 일은 하고 사는지, 그때 선생님이 너무 잔소리를 많이 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쏟아 내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다만, 언젠가 다시 좋은 소식이 닿아 연락을 하게 되면
그때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어리바리하고 서툰 선생님을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너는 어쩌면 영원히, 내가 퇴직할 때까지 결코 잊지 못할 첫 제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