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by 안녕

"맞는데...? 너 혹시 그 성희!?"

"네! 맞아요. 쌤!!! 잘 지내셨어요? 지금 어느 학교에 계세요?"



오랜만에 연락한 사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거의 9년 만에 연결된 성희와 나는 마치 어제도 학교에서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수다를 떨어댔다. 물론, 친밀함을 더해준 건 카톡이 한 몫했고.


9년 동안 나는 학교를 두 번 정도 옮겨 지금 세 번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과,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지금은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는 것, 지금 옮긴 학교는 무척 힘들어서 매일매일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말하기에 바빴고


성희는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늘 차분하고 얌전한 태도로


벌써 대학생이며 지금은 휴학한 상태라는 것과, 고등학교 때까지 지내던 곳에서 이사하여 지금은 대학교 근처에서 따로 자취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연락처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여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물어봐 연락을 했는데 운명적으로 연결이 되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뵙고 싶다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말해주었다.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장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한 시간 넘게 카톡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전했다. 어쩜 그렇게 편할 수가 있는지. 둘의 성향이 비슷해서일까 제자가 아닌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


주고받은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전공은 뭐냐, MBTI는 뭐냐, 요새 뭐 하고 지내냐, 대학 생활은 재미있느냐라는 질문을 건네면 성희는 내게 몇 학년 가르치세요, 요새 애들은 어때요, 따님은 몇 살이에요? 등을 물어왔다. 그러다가 문득 2015년도 육개장 모임 기억나느냐고 말하다가 우리가 읽었던 연애소설이 유명한 소설이더라, 오글거리더라, 라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를 남발하기도 했다.


마치 늦은 여름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수다를 떨듯.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는 중3이었다가 30대 초반이었다가, 스물다섯이었다가 40대 초반이 되었다.






성희가 학교로 찾아오는 날이 됐다.

밖에서 만나 맛있는 것을 사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5월의 학교는 너무나도 바빴다. 학년 부장은 쉽사리 조퇴를 쓰기에도 눈치 보이는 자리. 3시 30분까지 학교로 와주면 좋겠다고 말하자 기꺼이 응해준 성희가 고마웠다. 그 옛날 선생님이 과자 많이 사주었으니 이번엔 쌤이 좋아하는 커피 한 잔 사 오라고 너스레를 떨자, 성희가 주문받는다며 너스레를 떨어 왔다.


오늘만큼은 제발 사고 좀 치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한 5월의 어느 날. 성희를 만났다.

미리 주문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한 손에 들고선, 자신이 마실 커피 한 잔을 하나 더 챙겨서 등장한 성희는

대학생 태가 났다. 곱게 화장한 얼굴, 멋들어지게 입은 옷, 그리고 어딘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태도까지. 그런 모습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났다.


작은 체구, 조용한 말투, 소심한 성격. 여러 모로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봐왔다. 괴롭힘, 따돌림,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한가운데에서 만났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 녀석이 이렇게 커서 나를 찾고 내게 커피를 대접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쌤!!"


하는데 너무 반가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들이 놀라지 않게 소리를 낮추어 성희와 접선했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하며 내미는 커피는 내가 꼭 좋아하는 아바라. 그 옛날에도 너희 가르치며 빈속에 아바라 많이 먹어서 속 버렸다고 농담하자, 성희는 진짜냐고 물었다. 그래, 이게 성희지. 이런 순진한 구석이 엿보일 때마다 녀석은 열여섯 살의 성희가 되었다.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커피도 홀짝이며 시간을 보냈다. 9년 만에 만났지만 9시간 전에 만난 사람들 같았다. 그동안 카톡에선 말하지 못했던 진짜 삶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성희의 과거를, 현재를 이곳에 다 털어놓을 수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녀석은 지금 누구보다도 힘든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는 늘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것.


성희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불현듯 나는 스물다섯 살 때 뭘 하고 지냈나, 하는 생각에 닿았다. 상황 상 거의 가장처럼 삶을 살고 있는 성희는 어쩌면 나보다도 더 어른 같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힘든 일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담담하게 하나씩 부딪히면서 피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왔구나, 그래서 어엿하게 대학도 입학하고 이제는 정말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육개장' 모임을 너무나 의미 있게 기억해 주었다.

매주 만나 토론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좋았다면서, 그때 읽었던 책들을 아직도 기억한다면서, 심지어는 나도 잊어버린 몇 명의 멤버들을 손수 기억해 주었다. 선생님 덕분에 중3을 잘 보낼 수 있었다고, 선생님 덕분에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고 마음을 담아 이야기해주는 성희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은 5월의 어느 날이었고

학교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늦은 오후, 창 틈으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나는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겁날 것 하나 없던 9년 전으로 돌아가

까르르 웃다가 자지러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행복했다.







짧은 만남 후 다음을 기약하고 성희는 돌아갔다.

나는 평소처럼 아이를 하원하러 가기 위에 부랴부랴 짐을 싸 교무실을 나섰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녀석이 손수 적어온 편지와, 부러 사온 책이 든 가방이 묵직했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소설을 건네며, 어쩐지 선생님께 이 책을 드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성희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육개장 독서 모임에서 읽은 연애소설 작가의 차기작이었다.)


집에 가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운 후, 조용히 책상에 앉아 책을 들춰 보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종이 냄새가 좋았다. 봉투 안에 담긴 편지를 꺼내 읽었다.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읽으면서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빨리 읽다가는 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꾹꾹, 오래 눌러가며 읽었다. 눈에, 마음에 꼭 담아 두고 싶어서.


편지 내용 중 너무나 감동적인 표현이 있어 성희에게 당장에 카톡을 보내니 ㅋㅋㅋㅋ 하며 웃는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문학의 맛'을 찾기 위해 여정하는데 도움을 준 게 나라고 하니, 이런 멋들어진 편지 구절의 힘은 내게부터 온 것인가, 하며 속으로 너스레를 떨며 부끄럽지만 편지 일부분을 인용해 본다.


"우리는 거대한 해일처럼 몰아치는 운이나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삶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줄 알지만, 오히려 그런 거대한 기대와 기적에 가까운 것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더라고요. 저는, 비교로 칙칙한 하루를 만들기도 했고요. 그런 걸 보면, 행복은 커다란 해일처럼 단번에 몰아쳐 모든 것을 뒤바꾸는 것보다, 해변의 잔잔한 파도처럼 잔잔하게 다가와 모래알이 쌓이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중략)
오늘의 추억을 쌓고 쌓아 선생님의 행복에 잔잔히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교사로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학년 부장으로서의 자질을 있는지 의구심을 느끼며 스스로 초라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들은 예뻤지만, 예쁘지만, 예쁠 것이지만 어쩐지 나는 교사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에 휩싸일 때, 성희가 나타났다. 그리곤 내게


"선생님, 선생님은 되게 좋은 사람이에요. 덕분에 전,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힘이 되어 방학까지 버틸 수 있었다.


7월에 한 번 보자고 말하고 나선 학기말 바쁜 업무에 치여 아직 보지 못했다.

8월, 아니 9월이고 언제고 다시 성희를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나 역시 편지에 대한 답을 적어 갈 것이다. 두 손엔 아이스 바닐라 라테와, 카페 라테 한 잔을 들고서.




사진: UnsplashAmirreza Kimiya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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