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후에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서 만나길
100명 중 한 명은 꼭 있다. 글로 나를 감동시키는 아이. 매년 한 명 정도는 꼭 찾았는데 어쩐지 작년엔 글쓰기 수업을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어 우울했다. 글감을 주면 다섯 줄도 이어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좌절도 많이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반은 기대하고 반은 체념한 마음으로 글쓰기 수행평가 결과물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많은 글 중에 단연 돋보이는 글을 한 편 찾았다. 글쓴이는 규영.
‘아. 김규영. 너구만. 오~이런 감성이 있다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평소 책을 많이 읽고 말솜씨도 유려한 편이었다. 게다가 3월 초부터 아주 특별(?)한 학생이기도 했고.
3월 초에 신입생을 데리고 꼭 한 번은 도서관 이용 교육을 한다. 도서관 이용 규칙을 소개해주고 간단히 책을 빌려보는 경험을 하는데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던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던 규영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는데 다 못 읽었어요. “라며 한 손엔 <사피엔스>를 들고 있었다. 두 권의 책을 진짜 읽는 아이는 처음, 그것도 허세가 아니라 진짜 읽는 아이를 보는 것도 처음. 아니 솔직히 허세라고 하더라도 그 두 책을 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충격!
첫날, 첫 수업에서 ’ 각인‘된 규영이는 국어 수업 때 단연코 빛을 발했다. 녀석의 지식은 양날의 검이어서 수업에 도움이 될 때도, 약간의 방해가 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녀석의 ’ 지식‘에 감동하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면서 수업을 준비했다. 어휘 수업을 할 때 ’ 토마토‘를 ’ 일년감‘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도 규영이었다. 상식은 어쩐지 부족한 내게 규영이는 일종의 자극제 같은 학생이었던 셈. 물론, 수업에 관련 없는 말을 툭툭 던지거나 가끔 국어를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냉정하게 말할 때도 있었지만.
무튼 그런 규영이가 진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2학기, 글쓰기 수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수업. 학급 친구들이 쓴 글을 나중에 구글 클래스룸에 올려 서로의 글을 피드백해주기로 했다. 많은 아이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힘들어할 때 규영이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타닥타닥 타자를 치며 뭔가를 가득 적어 내려 가는 모습뿐이었다.
결과물을 검토하는데 이런. 너무 잘 쓴 것이 아닌가. 완전히 내 취향의 글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내용을 여러 가지 묘사를 활용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분명 평소에는 툭툭 내뱉는 말투, 약간은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탐독하는 규영이에게서 결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말랑말랑한 ’ 감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문학적으로 표현한 그 글을 읽고 처음으로 ’ 감동‘이라는 것을 받았다.
자신의 생각을 다섯 줄, 아니 단 세 줄 쓰라고 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생각했다. 생각 쓰기, 느낌 쓰기, 이야기 만들기 활동을 할 때면 늘 “싫어요. 이런 거 왜 해요”라며 강짜를 부리던 아이들이 많아 속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그 속에 규영이 같은 아이도 있었다는 것에 첫 번째 감동.
두 번째 감동은 이렇게 아주 사소한 글쓰기 수업에서 실력을 발휘할 정도라면 이 녀석이 제대로 글을 쓰면 얼마나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감동.
혼자 알기 아까워 규영이에게 동의를 구하고, 녀석의 글을 인쇄해 6개 반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름을 밝히는 건 싫다 하여 이름을 가린 채. 대부분의 1학년 아이들은 도대체 누가 쓴 글이냐며 궁금해했다. 아마 또래 친구의 글치고는 꽤나 잘 쓴 것이 인상 깊었던 듯하다. 규영이 역시 다른 친구들이 제 글을 보고 “잘 썼다. 좋다.”라고 말하는 것에 꽤 흡족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 구성도 꽤 괜찮게 했다. 12월에 마지막 수행평가를 위해 영상 제작 활동을 했는데 글쓰기를 너무 어려워하는 모둠 아이들을 이끌어 ‘E의 거짓'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멋지게 만들었다. ‘반전’이 뛰어난 작품이었는데 나름 시나리오가 탄탄하여 촬영이 어설픔에도 빛나 보였다. 물론 본인은 미흡하다며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규영이와 국어 수업을 통해 더 만났으면 좋으련만 올해도 다시 1학년을 가르치게 되어 만나지 못한 지 벌써 6개월이나 지났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감성적이고 따뜻한 글을 쓰는 규영이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특히 시간이 날 때, 혹은 수업 시간에 아직도 그렇게 섬세한 감성이 담긴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험 준비에 바빠서 글은 쓸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다.
나는 그저 규영이가 오래도록 글을 썼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꼭 제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일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따뜻한 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 훗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을 때 익숙한 녀석의 이름과 얼굴이 실린 글을 보게 된다면 너무나 반가울 것 같다.
그러면 난 책 한 권 사들고 그때 가르칠 제자들에게 소개할 게다. 그 옛날 가르치던 제자가 낸 책이라고.
내가 1호 팬이라고.
그런 날이 꼭, 찾아왔으면 좋겠다.
부디.
뒷 이야기: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늘 오전에 메시지를 보내니 규영이의 한 마디 “그러셔도 됩니다 “라고 답이 온다. 기대하라고 말하니 “네”라고 돌아온다. 역시 시크한 규영이 스타일이다. 나중에 이 글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글을 읽은 규영이는 어떻게 반응할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리고 다음화 예고: 규영이의 글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할 예정입니다. (규영이한테 인용을 해도 된다고 답을 받기는 했는데 다시 한번 확인 후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