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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양 Oct 06. 2021

차 한 모금에 런던으로...

나는 지금 런던의 공기를 마시고 있어

하루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다. 시간은 꽤 걸리는 일이니 곁에 차는 두고 싶은데, 마시고 싶은 차를 고를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때 지난주에 수업을 다녀와서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차 꾸러미가 보였다. 거기에서 랜덤으로 손에 잡힌 티박스가 그날의 차였다. 차는 얼 그레이. 가장 최근에 다녀왔던 런던에서 사 왔던 차였다.


여느 때처럼 물이 끓어오르는 것도 바라보지 못하고, 차의 건잎의 향도 맡아보지 못하고, 그냥 대충 식탁에 있는 아무 티팟에 차를 넣어 뜨거운 물을 붓고 타이머를 눌렀다. 타이머가 울리기 전까지 일처리에 필요한 것들은 재빠르게 챙겨 서재에 가져다 놨다. 타이머가 급하게 울리고, 다 우려진 잎을 거름망 채 꺼내놓고, 잔과 우려진 찻물을 서재 안 책상 위로 옮겨 놓았다. 달그락달그락거리던 찻잔, 찰랑찰랑 거리는 찻물의 모습이 영락없이 정신없고 급한 나의 마음과 닮아있었다. 한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기에 미리 화장실에 다녀오는 건 필수였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와서 그 방에 다시 들어선 순간!


"아, 나에겐 차가 있었지!" 

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

방 안에 가득한 얼그레이의 향에 나의 마음도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고, 가득 찬 차향을 느낀 순간 다시 숨을 쉬어본다. '휴우-'라고 숨을 내쉬고, '흐음-'하고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다시 숨을 마실 땐 그 차의 향을 온전히 다 들여놓을 것 마냥 깊게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아직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황인데 이미 나는 차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다.


건조해진 손에 핸드크림을 듬뿍 바르고 일을 시작하고 싶은데 꺼려진다. 핸드크림 향 때문에 나의 기분 좋은 상상이 깨질까 봐서다. 손은 잠시 그렇게 놔두지 뭐. 


그렇게 숨을 깊게 내쉬고 책상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으면 나는 어느 순간 런던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다. 차의 따뜻한 온기가 나를 벌써 그곳으로 데려가 준 것이다. 흐린 날씨 속의 쌀쌀한 아침 공기가 느껴진다. 런던에서 한창 수업을 다닐 때 느꼈던 그 느낌이다. 나는 얼그레이를 마신 것이 아니라, 마치 런던의 공기를 한 모금 마신 느낌이었다. 그렇게 런던을 한가득 내 몸속에 담은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해야 할 일도 마음만 급히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속도대로 차분히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야 하던지 물은 꼭 올린다. 그리고 차를 고른다. 정 급하면 티백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차 한 모금으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 즐거운 상상이 현실의 아쉬움을 달래고 앞날의 기대감을 더 높이기에 요즘엔 더 차를 우리 게 되는 것 같다.


꼭 내가 다녀온 곳이 아니더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차를 마시며 내 몸속에 그곳을 담아 본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곳에 갈 수 있겠지라는 긍정적인 믿음도 생긴다. 이 차가 나는 곳은 어떨까? 이 차를 재배하고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차를 마실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마시고 있는 차가 태어난 곳을 찾아 검색해 보고 책을 들춰본다. 이게 코로나 시대에 차를 마시면서 느끼는 나의 소소한 재미이다. 예전에는 다른 나라로 차 여행을 가는 것이 돈과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요즘이기에 먼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으니 차선책으로 이 재미에 빠진 것 같다. 소소한 일이지만 차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오늘은 어떤 차를 우려 어디로 여행을 가볼까? 딱히 급한 일이 없으니, 즐거운 추억을 가득 남겨 준 스리랑카로 가볼까? 그렇다면 차는 누와라엘리야가 좋겠다. 차 한 모금에 그곳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간다. 차밭에서 만난 그 아이들은 많이 컸겠지? 소박한 그 찻집의 주인아저씨와 아들도 잘 있으려나? 스리랑카의 쨍한 햇빛 아래 반짝이던 찻잎들의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오늘, 이 차를 고르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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