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생각나는 차
그렇다. 내가 차를 좋아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차와 함께 하면 내가 정말 내가 되는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매번 나와의 대화를 위해 차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차 한 잔이 생각날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이 멍하게 있을 때도, 일을 할 때도, 계절에 따라 바람이 다르게 느껴질 때도, 좀 더 개인적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화가 아주 많이 났을 때에도 꼭 생각이 난다.
가장 기분 좋게 차가 생각나는 때는 아무래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때인 것 같다. 정말 신기하게도, 봄에는 꼭 차나무의 이파리가 그대로 담겨있을 것만 같은 녹차와 나의 눈을 번뜩이게 만드는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가 떠오르고, 여름에는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히비스커스를 차갑게 냉침해서, 가을에는 무조건 스리랑카 홍차들과 무이암차가, 겨울에는 향신료 가득한 짜이가 생각난다.
차를 마시게 되면서 계절을 좀 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이제는 그냥 사계절뿐만 아니라 절기도 챙기며 차를 한 잔 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고작 입춘이나 입동 정도만 알고 지나갔다면 이젠 24절기를 하나하나 즐기면서 차를 마신다는 게 나에겐 참 즐거운 일 중 하나이다. 심지어 절기가 하나하나 돌아올 때마다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들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누었다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차를 즐겨 마시는 많은 분들도 나와 비슷하게 계절마다 생각나는 차들이 꼭 있을 것이다. 이게 참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또는 계절의 지나가고 찾아옴에 따라서 생각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참 소소하게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소소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큰 행복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의 햇빛과 바람과 온도를 차와 함께 흠뻑 느낄 수 있다는 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니까.
기분 좋고 따스한 햇빛이 비치는 봄이면 꼭 싱그러운 우리나라 녹차와 인도의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가 생각난다. 4~5월 사이에 햇차가 나오다 보니 초봄에 바로 그해 딴 차를 마실 수는 없기에, 나는 이때를 위해 작년의 녹차를 조금 챙겨 놓는 편이다. 빈 속에 차를 마시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봄에 즐기는 녹차만큼은 예외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기 전에 이 녹차를 우려 한 잔 마시면 그 순간 뭔가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 들면서 나의 몸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따뜻한 녹찻물이 나의 입과 식도를 통해 저 깊은 몸속으로 들어갈 때면! 정말로 내 몸속에 연둣빛의 새순이 돋고, 피어나는 것만 같이 맑고 또 맑게 퍼져 내가 마치 그 차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한다. 한 해를 시작하기에, 그리고 새로운 봄을 맞기에 이보다도 더 좋은 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의 봄에는 녹차가 꼭 필요하다. 이른 아침에 녹차를 한 잔 했다면, 늦은 오전에는 퍼스트 플러시가 제격이다. 나른한 봄날에 처음으로 수확한 다즐링을 다원 별로 즐기다 보면 봄날은 어느새 여름으로 향하고 있다. 차가 한 두세 잔 나올 정도의 티팟에 다즐링을 우려 서재로 가져온다. 오전에는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곤 하는데, 그때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와 함께 하면 나른한 기분도 잡아주어 좋다. 특히 다른 일을 하는 도중에 차를 마시는 거다 보니 별다른 디저트가 필요 없는 퍼스트 플러시는 차 자체만를 즐기기에도 참 좋다.
차를 따뜻하게 마시는 것을 선호하는 나이지만, 점점 더워지는 여름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차가운 음료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물론 나름의 호사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뜨겁게 차를 마시는 것도 즐기는 편이지만 에어컨 바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가끔 이벤트처럼 있는 일이다. 봄에 이어 녹차를 차갑게 냉침해서 마시는 것도 좋고,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로 새콤하고 새빨간 색이 참 사랑스러운 히비스커스도 차갑게 마시면 그것처럼 여름 나기에 안성맞춤인 것도 없다. 우리 몸의 온도를 내려주는 백차도 여름에 안 마셔주면 섭섭하다. 다른 건 냉침해도 이상하게 백차는 따뜻하게 마시고 싶어 지는데, 따뜻한 백호은침 한 잔이면 찻물의 온도는 따뜻해도 나의 마음은 시원해지는걸 조금씩 느끼게 된다.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느끼게 해 주는 차의 모습이 난 참 맘에 든다.
한없이 뜨거울 것만 같던 여름을 지나, 바람에서부터 쌀쌀함이 느껴지는 가을이 오면 바야흐로 차 마시기 딱 좋은 날들의 연속이다. 하루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섭섭하고 아쉬울 정도이니 말이다. 계절마다 차를 마시고픈 시간이 따로 생각나기 마련인데, 가을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차가 마시고 싶어 진다. 아침에는 쌀쌀한 바람에 차를 즐기고 싶고, 오전과 정오를 지나 오후까지는 저 파아란 하늘에 바라보다 보면 차 한 잔 하지 않는 것이 아쉬워 찻물을 올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 가을밤이 되면, 이때는 차 없이는 못 배기는 때이기에 다시 마실 차를 고르게 된다. 가을에는 차가 조금은 가벼워도 묵직해도 참 좋아 그 어느 차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아침에는 스리랑카의 누와라엘리야를 마셨다가, 낮에는 딤불라나 우바를 골라 마시고, 저녁에는 무이암차 중 하나를 골라 마시면 그날 하루는 온 집안이 차향을 가득해 그 향만으로도 참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차로 이 계절을 더 만끽하며, 가을이라는 계절이 있음에 그저 감사해지는 나날들이 된다.
쌀쌀함이 매서움으로 바뀌는 겨울에는 무조건 짜이를 챙겨 마신다. 짜이는 일반 밀크티보다 더 손쉽게 만들 수 있어 좋은데, 정말 귀찮을 때에는 찻잎과 향신료, 우유를 다 넣어 끓이면 된다. 짜이를 만들기 위해 작은 밀크팬을 꺼내고, 향신료도 하나둘씩 꺼내어 놓는다. 냉장고에는 늘 우유를 챙겨 놓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겨울이 온 것을 아는 것인지, 내 몸이 알아서 생각나게 하는 짜이 티. 찻잎에 베어 든 각종 향신료들이 나의 몸 구석구석에 닿아 혹독한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도와주리라 믿으며, 좀 더 진하게 마시기 위해 향신료들은 조금씩 으깨서 넣기도 한다. 시나몬, 생강, 후추, 카다몸, 정향 등을 가득 담은 짜이를 마시면 이번 겨울이 아무리 춥다 해도 힘이 난다.
그리고 다시 봄, 지난 계절 동안 자주 만나지 못해 그리웠던 차를 다시 꺼내며 찻물을 올린다.
내가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계절의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날들을, 차를 마시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순간으로 바꾸고 그 순간을 차와 함께 계절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때론 감격스러운 일인지... 오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랬었는지, 뭉게뭉게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는지, 아님 꾸물꾸물 흐릿한 모습으로 찌푸리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던 이전의 나의 삶을 생각하면, 차를 마시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혹시 요즘 너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당신이라면, 꼭 차 한 잔을 권하고 싶다. 나와 멀지 않은 곳이 있다면 기꺼이 내가 차를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 차 한 잔을 마실 때는 그래도 오늘의 하늘을 기억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