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고 엄마의 전화가 잦아졌다. 아빠의 부름과 부탁도. 마치 내가 원치 않았음에도 집의 해결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일하던 엄마에게 전화가 또 걸려왔다.
"먼지야. 너 안 바쁘지?"
"아니. 나 바쁜데~"
엄마가 무언가를 시키려고 전화한 것이 뻔해 보였기에 나는 장난 식으로 바쁘다며 대답했다.
"백수가 뭐가 바빠. 방에 틀어박혀서 놀고먹고 하면서."
"나도 바쁘거든?"
"놀지만 말고 A 사이트 들어가서 지금 신청할 수 있는지 찾아봐"
여느 때와 똑같은 엄마의 부탁에 나는 알겠다는 평범한 대답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하아.. 이제 엄마 전화 오는 게 무섭다. 무서워."
나중에 언니에게 들으니 엄마는 그 말이 서운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먼 훗날 내 자식이 나처럼 엄마에게 전화 오는 게 무섭다고 말한다면 나 또한 서운할 것 같았다. 보통 엄마, 아빠의 부탁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PC로 해결 가능한 것들이었고, 우리 부모님은 그런 것들에 익숙한 분들은 아니었다. 나 또한 나이가 들고, 계속해서 발전해가는 기술이나 지식들을 언제까지나 따라가진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미래에 그 시대의 기술과 지식에 익숙한 누군가에게 부탁하게 되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왜 엄마에게 짜증을 낸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백수라 놀고 있는데 부탁을 들어주는 게 뭐가 어렵냐'라는 식의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러서인 것 같다.
회사를 다닐 때 업무를 하다 보면 업무 요청 메일을 종종 보내곤 했다. 메일을 작성할 때 해당 업무의 마감 기간을 명시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앞에 붙이던 말이 있다.
'바쁘시겠지만 금요일까지 요청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을 붙여 요청받는 이의 바쁨을 인정해 주면서 약간은 미안한 듯(실제로는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일을 정중히 요청하는 것이다.
"백수니까. 어차피 놀면서. 네가 일하는 나 대신. 당연히 해줘야지."
"..."
다 맞는 말이니까 나는 할 말이 없다. 백수는 시간이 많으니 부탁을 한 번에 들어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백수는 부탁에 짜증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신의 시간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고 나의 시간도 온전히 나의 것인데, 백수인 나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백수의 시간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