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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Feb 07. 2020

#고려장

1. 시한부 선고, 그 끝자락에서

2018년 06월 30일. 토요일



오전 7시, 잠을 깨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서 먼저 일어난 아빠를 마주했다. 나는 순간 놀랬다. 어제 밤에는 아빠가 이렇게 노란빛을 띄고 있었는지 몰랐다. 아빠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밤이라 조명과 피곤함에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불안감은 다시 찾아왔다. 한의학관련 공부를 했던 짧은 지식으로 눈에 나타나는 증상이면 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악이면 간암이다.’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틀리기를. 제발 심각한 상황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오전 9시, 우리는 강릉 아산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들어갔다. 아빠는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는데 어떤 수치가 좋지 않은지 CT를 찍자고 한다. 병원에서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잠시 후, CT촬영을 하고 나온 아빠에게 말했다. 

“제발 중한 게 아니길 빌어. 심각한 거면 답이 없다.”

아빠는 경제적인 대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흔한 보험 하나가 없었다. 아들이 능력이 좋아 다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 역시 내 앞가림만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별일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의 시간은 빠른 듯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아빠는 환자가 되어 응급실 침대에 누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관계자가 나를 따로 불렀다. 왜 굳이 따로 부를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췌장에서 종양이 나왔고, 간에도 얼마가 전이됐으며…”

다음 말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 좋다는 말이라는 건 이미 충분히 알았다. 

“종양이요? 그럼 암 아닌가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CT결과가 100% 확진이 아니라는 위로 아닌 위로로 나에게 말하고 있지만 내 머리는 아파오고 있었다. 

“MRI를 찍으면 확진…”

“찍으시죠.”

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MRI촬영을 하자고 했다. 남아있는 10%에 희망을 걸고 싶었다. CT결과가 틀렸을 수도 있는 그 10%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차마 아빠에게 방금 들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충 얼버무리며 MRI촬영을 더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시 하염없는 기다림에 들어갔다. 


어느덧, 나는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이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옳은 건지. 쉽사리 결정하기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동생 그리고 아빠의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고 싶었다. 


아빠의 아빠인 할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많은 것을 일군 사람이었다. 꽤나 영향력이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병은 우리 집안의 많은 것을 가져갔다. 할아버지가 투병 생활을 하던 몇 년간 집안의 기둥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대기 중에 췌장암이 어떤 병인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가망이 없다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뽑을 기둥조차 없는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MRI촬영이 끝났지만 결과는 바로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지금 아빠의 상태를 설명하며 입원을 권유했지만 난 그 권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현실이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입원을 안하고 퇴원을 하겠다고 하자. 여러 절차들이 벽처럼 내게 나타났다. 담당의사와 대화를 해야 하며, 어떤 서류도 작성을 해야 했다. 그때, 날 바라보던 간호사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마치, 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하는. 날 쓰레기처럼 바라보는 듯했다.


아빠도 설득해서 퇴원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불안해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아빠도 지금 본인의 현실을 인정하는 듯했다. 또 다시 대기를 하며 아빠와 여러 대화를 나눴다. 아빠는 할아버지도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해줬는데 암이라는 건 알았지만 췌장암이었는지는 몰랐다. 할아버지는 내가 7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잘 기억에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의 장면이 부분부분 기억에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상여를 여러 사람들이 들고 마을을 돌던 장면. 할아버지의 관을 집 근처에 있는 산소에 묻는 장면. 그리고 그 앞에서 처음으로 아빠가 울고 있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결국 저녁 6시쯤 우리는 병원을 나오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긴 하루였다. 병원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아파지는 것 같았다. 강릉에서 돌아오는 길, 아빠에게 저녁을 먹고가자 했다. 

“아빠,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빠는 속초에 있는 어느 고깃집을 말했다. 난 아빠가 원하는 저녁을 사주고 싶었다. 왠지 최후의 만찬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잔을 마셨다. 그 어느 때보다 씁쓸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 조만간 약을 사서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서울로 향했다. 어쩌면 난 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깊은 산속에 고려장을 하고 돌아오는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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