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나하고 놀던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보며 살자 그랬죠. 날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그렇게 푸근해질 수 없었다. 나의 아빠는 꽃밭을 가꾼 적도 없고, 날더러 꽃같이 살자고 하신 적도 없었지만, 아빠 생각이 날 때면 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어린 시절, 나의 아빠는 해외 건설근로자셨다.
1970, 80년대 한국에는 중동 건설 붐이 일었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중동으로 파견이 되었고, 우리 아빠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현재는 이 자리를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태국 등에서 차지했지만, 그때는 한국인이 대세였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어린아이였다. 엄마를 통해 동생이 돌 지난 무렵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엄마도 꽤 어린 나이에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신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아빠가 부재한 시절은 내가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직전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1년 후,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빠가 선물해주신 손목시계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아이보리빛 본체 위에 빨간색으로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정사각에 모서리는 굴곡이 진 하얀 줄의 전자시계였다. 물론 선물 받고 하루 사이에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집 앞 냇가에서 놀기 위해 아빠가 사준 시계를 다리 위에 풀어놓고 놀았더랬다. 잃어버린 것을 알고 다시 집 앞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시계는 사라졌다. 누군가 주워갔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시계를 풀어 둔 그곳은 어마어마한 양의 시멘트로 덮여 있어 그곳에 함께 묻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혼이 났었는지, 괜찮다고 하셨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너무 속이 상했던 그날의 마음만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지금은 무용담처럼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청춘이어도 당시에는 굉장히 고된 노동이었을 것이다. 50도에 육박하는 기온 속에서 야외 육체노동은 고문과도 같은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지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그 대단한 더위를 버티느라 오늘날 아빠의 머리가 벗어진 거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는데, 그 말씀이 마냥 농담처럼만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튼 내 초등학교 시절 아빠는 주로 해외에 계셨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아빠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늘 아빠에게 편지를 쓰고, 아빠의 답장을 받고 눈물짓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던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여러모로 챙겨주셨다. 아빠에게 매일매일 편지를 쓰라고 하시는가 하면, 아빠를 주제로 말하기 대회에 나가게끔 하셔서 처음으로 학교방송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다.
아빠의 편지 내용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엄마 말씀 잘 듣거라,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물어라, 등등.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물어라'라는 것이었다. 아빠는 큰 딸인 내게 많은 기대를 하셨다. 아빠가 미처 채우지 못한 공부의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기를 바라셨고, 늘 부실한 동생을 대신해 더욱 건강하기를 바라셨다. 그 기대에 미치기 위해, 그리고 칭찬에 박한 부모님에게 그나마라도 칭찬을 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그 결과, 중학교를 전교 2등인가 3등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그렇게 간절할 때는 잘만 되더니만, 그 후에는 점점 평범한 인간으로 성장했다.
아무튼 아빠는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었지만, 아빠는 엄마를 더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두툼한 편지 봉투를 뜯어보면, 엄마에게 쓴 편지와 나에게 혹은 동생을 포함한 자식들에게 쓴 편지가 각각 들어있었는데, 무게를 고려하여 습자지처럼 비치는 얇은 편지지에 명필로 꾹꾹 눌러 담아 쓰셨다. 나에겐 주로 이런저런 부탁과 교훈적인 말씀이 주를 이뤘지만, 몰래 읽어본 엄마 편지에는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몰래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사랑의 메세지가 설레어서라기 보다는 몰래 훔쳐보는 긴장감과 무뚝뚝한 아빠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언어들이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식은 죽을 때까지 부모의 마음을 온전하게 헤아리지 못한다.
늘 엄마를 걱정하고, 엄마에 대한 사랑이 충만했던(물론, 매우 가부장적인 분이셔서 그 사랑도 아빠 방식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지만 말이다) 분이시기에, 굳이 무게로 따지자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엄마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그것은 온전히 자식만의 생각이었다.
몇 해 전인가, 아빠는 임종체험을 해보셨다고 했다. 연세 드신 분이 그런 체험을 하셨다는 게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기도 해서, 그 어색함을 넘겨버리기 위해 '아빠는 별 걸 다 해보시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흘러 넘긴 적이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더 찡하게 만든 것은 나중에 본 사진 속 문구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질문이 있었고, 거기에 아빠는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고 싶다'라고 적어놓으셨다. 이 문구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아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경제력으로 자식들을 편안하게 키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으셨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상냥하고, 다정하고, 자상한' 아빠이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빠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던 건 이때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제주 근무로 주말부부를 하게 된 우리에게 아빠가 매번 하시는 말씀이 있다. '아이고, 우리 딸 고생한다'가 아닌 '에휴, 이렇게 처자식 두고 떠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안 좋을꼬. 집에 혼자서 들어가면 처음에나 자유롭고 좋지, 엄청 외롭지. 너도 너지만, 겸이가 되게 보고 싶을 거야. 처보다 자식이 더 보고 싶어. 그럼 그렇고 말고.'라고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풍겨지는 뉘앙스가 '너는 모르지?'였다. '평일 내내 애 보는 내가 더 힘들지, 평일이 자유로운 사람이 뭐가 더 힘드냐'며 항의했지만, 사실 아빠의 말씀에 대한 적당한 반응이 떠오르지 않아서 던진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엄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 거였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깨닫는 '바보 같은 자식'일 뿐이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아직 부모로서는 경력이 짧아서인지 이런 경험을 통해야나 부모를 헤아릴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올해 칠순이 되시는 우리 아빠. 비록 아빠를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만든 장본인이 '나'이지만, 연세만으로도 어디서나 할아버지인 것은 분명하다. 64세에도 10kg에 육박하는 우리 아이를 등에 업고 성산일출봉을 오르셨을 정도로 평소 체력이 좋으셨던 양반인데, 요즘은 부쩍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이고, 이제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어서 못하겠다'라시며 대찬 코골이 실력으로 금세 잠드시는 모습을 볼 때면 아빠도 늙으셨구나,를 체감하게 된다. 하지만, 아빠의 '나이 듦'을 절감하는 순간은 체력보다는 기억력 때문인 것 같다. 철두철미한 성격을 가지신 아빠가 툭하면 '아! 깜빡했네!", "그랬었어? 도무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라는 말씀을 연발하실 때면 그렇게 마음이 서글플 수가 없다.
정년퇴임 후 다시 일자리를 찾으신 아빠는 혼자 아이 돌보는 딸을 도와주시기 위해 본거지를 옮겨 근처로 이사를 오셨고, 여전히 그 일을 위해 출퇴근을 하고 계신다. 본래는 걸어서도 출근이 가능한 거리에 살고 계셨는데, 이제는 왕복 3시간이 되는 거리를 오가신다.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를 픽업하시는 것도 아빠시고, 당신 집에서 아침밥을 먹여 아이 등원을 시키시는 것도 거의 아빠시다. 또, 분리수거 날마다 부피가 큰 쓰레기가 많다며 딸이 퇴근도 하기 전에 이미 다 치워두시는 것도 아빠시다. 죄인이 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평소의 삶에서는 또 그것을 잊고 당연한 듯 받아먹으며 산다.
가끔씩 가부장적인 아빠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는 엄마로 인해, 나와 무관한 일로 아빠를 미워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아빠 생각이 간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