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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an 16. 2019

남편이 사라졌다.

남편! 내가 더 서운해!




주말부부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였다. 혼자서 육아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매일 성장하는 모습을 아빠가 볼 수 없다는 것과 아빠를 모방하며 커야 하는 아들에게 아빠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매주 금요일 밤에 집에 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제주로 출발하는 남편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것은 아이였다. 요일에 대한 개념이 설었던 아이가 아빠가 오는 '금요일'을 시작으로 요일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빠와 헤어지는 '일요일'이 되면, '안 쉬는 날이 두 번이고, 쉬는 날이 다섯 번이면 좋겠다'라며 엄마 아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안 쉬는 날이 두 번이고, 쉬는 날이 다섯 번이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어른들은 모두 찬성이지!"라며 동심 파괴 대답을 하지만, 실은 우리 가족에게 쉬는 날은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가족상봉의 날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회사를 마치고 본가로 오는 금요일에는 식사 시간도 애매해서 편의점 샌드위치나 김밥 정도로 끼니를 때우고 온다. 그렇게 와도 밤 비행기에 공항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1시 전후이다. 일주일에 5일 일하고 이틀을 쉬는 지금이지만, 그 이틀도 우리 가족에게는 48시간을 꽉 채우지 못해서 늘 아쉽다.


그렇다 보니 어지간해서는 주말에 별다른 약속을 만들지 않는다. 머리를 할 때가 되어도 가급적이면 주말은 피하려고 하고, 남편 역시 괜찮은 강의 하나 들으러 가는 것도 주말에는 망설이곤 한다. 그래서 주말에 아이로부터 아빠를 빼앗는 눈치 없는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일도 생긴다.


가끔 회사일이 많거나 날씨 여건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할 경우, 주가 미뤄져서 열이틀 만에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눈물겨운 부자지간의 영상통화로 만족해야 한다. 조차도 남편의 야근과 아이의 취침시간 등 여건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주말부부 생활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와의 만남이 간절한 가족이다 보니 남편 역시 아이와 놀아주는 일에 전과 다르게 열과 성을 다한다. 같이 지낼 때는 서로의 소중함이 익숙함에 묻혀서 아무래도 아이와의 놀이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에 더 열중할 때도 많고, 아이의 부탁을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일주일 동안 아빠만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서 남편은 이전보다 훨씬 성의 있고 밀도 있게 놀아준다. 아빠 놀이 백과사전 같은 책을 사서 아이와 놀거리를 연구하기도 하고, 아이의 부탁에 전보다 허용적으로 반응한다. 그렇다 보니 아이는 아빠와의 놀이를 그전보다 더 기뻐하며 금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이와의 놀이는 '그 시간보다 놀이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이런 남편도 가끔은 지칠 때가 있는가 보다.

사소한 일로 아이를 울리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함께 해줄 수 없는 아빠로서 '바른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욕심이 과해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간혹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게 하지 않기 위해, 매우 강한 방식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들이 있는데, 남편 역시 그런 류의 바람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한 번은 가족행사를 다녀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줘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곤 아이가 잠이 들어서 장난감 가게에 들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금세 잠이 깬 아이는 약속을 지키라며 함께 잠든 아빠를 깨웠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아빠의 급소를 치고 만 것이다. 아빠는 '억'소리를 냈고, 아이는 일어나지 않는 아빠에게 사과는커녕 심술만 부리다가 방을 나왔다. 시간이 지나 아빠가 잠에서 깼고, 마음이 풀린 아이는 살랑거리며 아빠에게 다가가서 장난감을 사러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아빠에게 먼저 해야 할 말이 없냐며 아이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이미 1시간이 지나서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아빠의 진지한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 있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에게 사과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비록 실수로 한 것이라도 잘못한 것은 사과를 해야 해. 그런데 겸이는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네. 아까는 겸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아빠가 사준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어."라고 했다.


평소에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줄 때면 아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하려고 일부러 '아빠'가 사준 것이라고 하는 나였다. 그렇게 아빠를 치켜세우며 아이와 함께 기쁜 마음을 공유했다. 그렇기에 이 같은 남편의 대답은 아이 못지않게 나도 무척 서운했다.


남편의 훈육의 이유가 틀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시기와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일주일에 몇 시간 못 만나는'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대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더 서운하다'라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려서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이 역시 서운함을 못 이기고 나에게 와서 안겼다. 거실에 있는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 물론 그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남편과 아이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내 마음만 전쟁 중인 듯 보였다. 그 사이 남편은 방으로 들어와서 내가 더 서운해하느냐며 내일은 사줄 거라고 말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고 있지는 못하는 듯했다.


남편에게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눈물이 날 정도로 서운했는데 겸이는 어땠을까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속이 상해. 5살짜리 아이에게 얼마나 높은 기대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까 그 상황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어.

우선은 겸이에 대해 아직도 그렇게 이해를 못하고 있나 하는 답답함이 들어. 자존심이 센 아이라 적당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해야 받아들이는 아이야. 알아도 모른다고 하고, 알아도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한테 꼭 그 상황에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지 정말 나는 모르겠어. 겸이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들의 특징 아니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이야기를 해주면 열린 마음으로 들을 텐데 너무 생뚱맞은 시간에 (상황이 일어나고 1시간이나 지난 후에, 아이는 이미 상황이 종료가 되었다고 여겼을 법한 시점에) 그런 진지한 설교가 필요했을까 싶네.     

물론 겸이가 잘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냐. 실수라도 잘못한 것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도 맞고. 하지만, 그러려고 했다면 그 즉시 했어야 해. 필요한 교정은 즉각적으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효과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릴수록 왜 내가 혼나고 있는지 훈계의 필요성 조차 이해하기 어려워져.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서운했던 것은 훈계의 방식이야. 아까도 잠깐 얘기했지만, 겸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뺏는 것으로 벌을 주는 것은 적절한 방법도 아니고 너무 가혹해. 그리고 “아빠가 약속한 것은 아니었어. 그냥 아빠가 해주고 싶었던 건데 지금은 아니야”라는 말은 너무 치사한 변명처럼 들렸어. 내가 듣기에도 그런데 겸이는 오죽했을까.      

아침부터 아빠랑 보드게임하고 싶단 말에 밥 먹는 게 우선이니 밥 먹고 하자는 가르침(잠깐 시작해보고 밥 준비되면 이따가 다시 하자,라고 말해도 되었을 텐데...), 밥 먹고 나선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에 겸이는 아빠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을 거고, 장난감을 사러 가는 줄 알았는데 집인 데다 부족한 잠을 자고 예민해진 상황에서 엄마 아빠가 혹시 꿈꾼 것 아니냐는 장난에 신경질이 났던 아이인데, 거기에 뒤늦게 잘못한 거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는 훈계만 하고, 장난감 사주고 싶지 않다고 변심한 아빠의 말에 또 한 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겸이가 과연 아빠에게 어떤 기대를 할까 싶네.     

H(조카) 장난감 사주면 겸이도 갖고 싶어 할 거라는 내 말에 그럼 ‘겸이도 사주면 돼지, 아빠가 사줄게’라고 분명히 말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사과를 안 했다는 이유로 약속한 것은 아니라고 말을 바꾸는 것은 정말 비겁하고 유치한 아빠의 모습이었어. 아이를 교육하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 사과 못 받아서 너한테 선물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는 유치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지. 아마 겸이도 그렇게 받아들였을 거야. 꼬마들끼리 말다툼을 하고 마음이 안 풀려서 생일선물 안 준다고 하는 것과 과연 다를게 뭘까...      

그리고 벌을 주려거든 잘못한 행동 범위 안에서 벌을 주는 게 교육적으로 옳다고 해. 이를테면, TV 보는 시간 약속을 안 지킨 것에 대한 벌은 다음번에 TV 보는 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소거의 벌’을 주는 게 효과적이지, TV에 대한 벌로서 용돈을 줄인다든지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은 벌의 효과가 없다는 거야.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는 벌은 장난감을 소홀히 여겼거나 정리를 안 한 것에 대한 벌로서 적당하다는 말이지. 게다가 겸이가 가장 기대하고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을 벌로 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정서적으로 학대를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 돈을 가진 부모로서 장난감이 절박한 아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횡포 같았거든. 약속도 즉흥적으로 하고, 벌도 즉흥적으로 내리니 아이의 기분은 천국과 지옥이었겠지.    

아빠와 이야기를 마친 겸이가 방으로 들어와서 물어봤어. 겸이 아빠랑 무슨 이야기 했냐고, “장난감 안 사준 대요”, “왜?”, “아빠한테 사과 안 해서.” 이게 아빠 훈육의 결과야. 만족스러워?     

평일 내내 아빠를 기다린 아이에게 훈육보다는 보듬어주길 기대했어. 내가 혼낼 때 '아빠라도 편을 들어주면 위안이 된다'는 겸이의 말만 들어도 그렇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자식에 대해 바른 아이로 자라주기 바라는 마음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보듬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설령 내가 혼을 내도, 나는 아빠가 겸이 편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아빠면 좋겠어. 당신의 바람처럼 겸이 혼낼 때 같이 동조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바람이 아니라. 겸이도 무조건적으로 기대고 숨을 수 있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게 엄마가 되건 아빠가 되건.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고 겸이가 버릇없이 막무가내로 자랄 아이도 아니라는 확신쯤은 있어.        

내일 사줄 거란 말. 참 우습다. 겸이 장난감이 부족해서 안 사준단 말을 더 서운하게 느낀 거라고 여기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지금 웃으며 TV 보고 대화하고 놀고 있지만, 겸이는 기억할 거야.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부모의 모습을 말이지. 나도 물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권위적인 부모(양육방식)가 좋은 거라고 말했지? 교육심리에서 '권위적인 부모'는 아이가 달성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기준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자유와 자율성을 허용하는 양육방식을 가진 부모를 말해. 이 과정을 통해 부모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을 얻게 되는 거고. 지시가 명확하고 사소한 약속도 잘 지키는 일관성 있는 부모를 말하는 것이지, 가부장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권위적인 양육방식'이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가르치고, 어른으로 대접받으려는 부모로서의 권위가 아니야. 사소한 약속도 잘 지켜야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있는 아이로 키울 수 있어. 겸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해는 없이, 부모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도 없이, 그저 잘못을 훈계하려는 마음만 앞선 건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 메세지를 보낸 후 아이와 함께 먼저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은 집에 없었다. 먼저 일어난 아이가 아빠를 찾았고, 전화를 걸어 아이에게 내어주었다. 남편은 근처 야산으로 산책을 나간 듯했다. 아마 자신도 마음이 복잡했으리라.


돌아온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를 대했고, 나 역시 남편에게 그러했다. 일방적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풀어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모질 수도 있는 말임에도 남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일 이후, 남편은 가급적 아이를 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내 말을 받아들여서 일 수도 있고, 내 말속에 일부분이 아빠를 뼈 저리게 했을 수도 있다.


남편이 내게 가장 바라는 것이 '아이를 훈육할 때 아이를 거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한 후로는 아무리 남편이 틀린 말을 해도 아이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이와의 전쟁에서 항상 내가 자신의 편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기에(남편은 물론 항상 그렇게 말한다. 무조건 엄마 말이 맞다고), 이번과 같은 일은 남편에게 적잖이 서운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다.


내가 비록 '선생 같은' 행동으로 남편을 지적했고 이번 일에 있어서 남편이 무조건적으로 잘못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남편은 그동안 좋은 아빠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린이집 설명회에 엄마 아빠가 모두 참석한 가정은 우리가 유일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남편은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좋은 아빠를 갈구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일이 주말부부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났다면 이렇게까지 심각한 일로 비화되었을까. 아마도 매일같이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가족의 삶.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다독이며 살아야 하는데, 사소한 것에 오히려 서운함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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