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teaterrace Sep 02. 2019

누가 분리수거를 하는지가 중요하나고요?

그럼요.



분리수거 날이다.


가장 회피하고 싶은 날. 누가 분리수거를 하느냐를 두고 남편과 신경전을 벌여서가 아니다.


나는 그럴 남편도 없다.     


남편이 떠나고 분리수거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주로는 내가 퇴근하기 이전에 친정 부모님이 치워주신다.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사하지만 죄송하기 때문에. 남편이 떠난 후로 우리 집 일의 많은 부분이 부모님의 몫이 되었다. 극구 말려도 소용없다. 그저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 한 번을 해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그게 부모 마음인 것이다.       


집안일의 많은 부분 가운데 분리수거가 유독 싫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많은 학생들 때문이다. 재학생, 졸업생 불문하고 참 많다.


어쨌든 누가 분리수거를 하는지 어른에게 중요한 이유는 귀찮음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분리수거를 대하는 마음은 어른과 다르다. 래서 어른은 체면도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 완전 가정적이세요. 사모님 대신 분리수거도 해주시고.”     


이런 사고를 하는 것이 바로 10대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직접 분리수거를 하는 것을 목격당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 가정의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도 구차하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공적인 모습만 보여지기를 원한다. 가정주부로서의 모습을 굳이 노출하기도 싫을뿐더러, 아내더러 직접 분리수거를 하게 만든 남편과 사는 가여운 선생님으로 비춰지는 건 더욱 싫다. 물론 나 자신만 당당하면 되기는 하다. 하지만, 10대 아이들에게는 다르다. 




그럼 왜 학교 가까이서 사냐고?


복직을 하면서 가급적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왔다. 결혼 후 신혼집을 얻을 때부터 집의 위치를 정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직장과의 거리였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남편과 나의 근무지간 거리가 1시간 이상이기 때문에  쪽이라도 더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운전을 못하는 내 쪽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학교와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육아휴직을 해서는 남편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고 복직해서는 다시 학교 근처로 돌아왔다. 최대한 늦게 출근할 수 있고, 최대한 빨리 퇴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란 자고로 출퇴근 시간을 사수해야 한다.


그랬더니 자꾸 만난다. 퇴근 후 동네에서 '철없는 직장 상사'를 만난 기분이랄까. 이 철부지 상사는 입도 종잇장 같아서 학교에 가면 자랑삼아 애들 앞에서 굳이 물어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주로 남편이 맡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내가 한다고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 와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미안하지만,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아."


울상을 짓는 나를 보며 남편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래,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렇게 도맡던 남편이 이제는 없다.

 



알아보고 인사해도 문제, 슬쩍 보고 모른 척 해도 문제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만나는 것이 영 편치 않지만, 그렇다고 분리수거를 하는데 차려입기도 뭣하다. 두 손 가득 분리수거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제발 아무도 없어라, 없어라, 없어라'


엘리베이터 창문 사이로 누군가 보이면, '부디 모르는 사람이기를, 부디'라고 주문을 건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면, 가볍게 눈인사만 하면 된다. 불행히도 졸업생이나 재학생이면, 멋쩍은 인사를 건네야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 안녕, 어디... 가니?"


어색하기는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공적인 관계가 사적으로 만나면 누구나 그렇다. 체면을 차려야 하는 쪽이 조금 더 머쓱하기는 하다.


"아, 안...녕하세요. 독...서실 가려고...요."


슬쩍 보고 모른 척할 때가 더 난감하다. 내가 가르치지는 않는데 낯이 익은 얼굴이거나, 또는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아이가 나를 알고 힐끔거릴 때가 있다. 교복을 입고 있몰라도, 사복의 경우에는 함부로 확신할 수 없다.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던 아이일 수 있.  이때, 먼저 인사를 건네면 아이들은 경계하거나 당황한다. 이럴 때는 주로 앞만 응시하는데 1층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억겁과 같다.


만나는 장소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분리수거장일 때 더 죽을 맛이다. 엘리베이터처럼 서로 인사를 나눌 짧은 기회도 없. 그럴 땐 묵묵히 서로 각자의 할 일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 아이가 부모님과 같이 나와서 분리수거를 할 때면 민망함의 수치가 최고조를 찍는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어색하고, 나는 나대로 어렵다.



어쩔 수 없다. 부모님이 분리수거하시는 것 죄송함에 만류하면서도 그 강도가 솔직히 지는 않다. 아유, 안 하셔도 되는데...(해주셔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감사함을 핑계 삼아 저녁을 사드린다. 핑계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 먹는 음식을 반기지 않는 부모님 세대 관념 때문이다. 돈도 아깝고 집밥보다 좋을 수 없다는.


그렇다고해서 분리수거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가끔 내가 버릴 기회가  때도 있다. 럴 때면 주로는 퇴근 직후와 야밤 시간을 이용한다. 아직 아이들이 아직 귀가를 안 했거나 외출할 리 없는 시간을 노리는 것이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정도면 분리수거를 누가 하는지가 나에게 왜 중요한지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된다.


출퇴근 시간 사수를 위해 프라이버시가 침해된 삶이라니. 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숨어 사는 삶은 또 뭔지. 신이시여. 대가 복을 쌓아야 주말부부 할 수 있는 거 정말 맞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또 주말부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