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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ul 31. 2019

지금 만나러 갑니다. 남편을.



공항으로 가는 길.


어김없이 아이는 잠이 들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평일에 비해 주말이 한산한 편이다. 남편의 말대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공항에 도착했고 막 잠이 든 아이를 깨워야 한다.


"겸아, 미안. 엄마가 겸이를 안을 수가 없어서 겸이가 일어나야 해."


상황을 금세 인지한 아이가 비틀거리며 걷는다. 버스에 내려서는 아이를 업는다. 오가는 차들도 많아 그러는 편이 차라리 안심이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가슴에는 가방을 둘러매고 공항으로 향한다. 수속 층에 도착하니 아이가 이제 내려도 괜찮겠다는 사인을 보내온다. 역시 컸다.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주는 제스처만 보이면 이내 만족하고 도로 집어넣는다.


아이를 동반하면 셀프체크인 서비스가 제한이 된다. 아무래도 유괴 등의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이겠거니 싶어 불편해도 늘 수속 카운터를 찾는다. 체크인을 하고 시간이 남는다. 늘 빠듯하게 도착하던 금요일 저녁 시간을 생각해서 출발했더니 이번엔 여유롭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가방에 컬러링북과 색연필을 준비해왔다. 게이트 근처의 카페에 큰 사이즈의 음료를 주문하고 마주 보고 앉아 함께 색칠을 시작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밀려왔는데 나도 모르게 괜히 뿌듯했다. 아들과 데이트를 꿈꾸는 엄마의 바람 연장선이다.


우리 아들은 다행히 엄마와의 '비밀 데이트'를 꽤 좋아한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 카페에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이거, 우리 비밀 데이트야'라고 이야기하면 아빠는 모르는 비밀이 생겼다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제주에서도 가끔씩 아이와 함께 가는 카페가 있는데, 쉬는 날에 그곳에 아빠와 함께 갈라치면 작은 목소리로 "엄마, 여기 우리 비밀 데이트 장소잖아요"라며 나를 타박한다. 아이들에게 '비밀'이란 상대와의 끈끈한 관계를 대변하는 말과도 같은 듯하다.

 


곧 탑승시간이다. 탑승 전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엄마보다 앞장서서 좌석을 찾는 아이의 뒷모습도 훌쩍 커 보인다.


"엄마, 여기 22번. 어? 근데..."


우리 옆자리 손님이 먼저 도착해있다. 아이의 반응을 보고 재빨리 일어서 준다.


다행스럽게 우리 앞자리에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앉아계신다.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재잘거리며 과자를 먹어도 눈치를 주는 이가 없다. 가끔씩 스스로 통제 안 되는 고성이 나와 입을 틀어막기는 했지만. 지난 비행에 비하면 양호하다. 그럼에도 피곤하셨을 앞좌석 어르신들에게 "많이 시끄러우셨지요"라고 여쭈니, 괜찮았다는 대답을 들어 마음도 편하다.

 

문제는 태풍 '다나스'의 끝자락에 들어선 제주의 날씨였다. 착륙 전 구름 위의 하늘은 매우 맑고 푸르렀다. 하지만, 구름 아래로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흐릿하고 비가 온다.  비행기는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바람만 거세게 불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운항에 문제가 없다.  아이에게 괜히 겁을 주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겸아, 비바람이 많이 불어서 공항에 내리지 못할 수도 있대."

"정말? 그럼 어떻게 해 우리는?"

"김포로 다시 돌아가야지."


얼굴빛이 잿빛이다. 그러더니 금세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한다. 두 눈을 꼭 감고 앵두 같은 입술은 오물조물 움직거린다. 여기서 장난을 멈추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눈을 뜨고는 창밖의 비 오는 풍경을 멀뚱하니 보더니 손바닥을 창문에 가져다댄다. 하늘을 어루만지듯.

 

"비야 비야 오지 마라."


타령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하다. 아이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을까. 정말 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체가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움직임을 서서히 멈춰서였으리라. 그래도 아이는 너무 기뻐다.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니 조금 전 짓궂은 장난이 미안하게 느껴다. 그래도 사실을 말하면 오히려 자신의 기도 효과에 실망할 수도 있으므로, 작은 거짓말은 묻어두기로 다.



김포에서 연결 버스를 타고 탑승을 하면 내릴 때도 주로 같은 방식으로 공항에 들어간다. 비 오는 날 연결 버스를 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비가 오지 않아도 바람이 많은 활주로인데 비까지 오면 더 어려울 수밖에. 게다가 아이까지 있으면 더욱 싫다. 다시 아이 찬스를 써본다.


"겸아, 아까 우리 버스 타고 비행기 탔잖아. 내릴 때도 버스 탈지도 몰라. 겸이가 기도 좀 해줄래? 비 오니까 버스 타지 않고 내릴 수 있게."



아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두 입술을 꼭 다물고는 또다시 기도를 시작한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종교도 없다. '하늘님'에게 바치는 기도이다. 아이의 기도는 이번에도 성공이다. 연결 버스가 아닌 브릿지를 통해 공항으로 이동을 했다.


수하물이 없기에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엄마, 이번에는 아빠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저번에처럼 늦게 와서 우리를 기다리게 할까요?"


"글쎄, 겸이 생각은 어때? 이번에는 아빠가 몇 점일까?"


"엄마, 겸이 생각에 이번에는 아빠 100점일 거 같아요."

 

보통은 착륙과 동시에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는 나도 아이의 내기에 내심 기대를 해본다. 게이트가 열리고 두리번거리는데 남편이 멀찍이서 우리 모자를 핸드폰으로 찍고 있다. 아이가 제 아빠에게 힘껏 달려간다.


"것 봐요, 오늘은 아빠가 100점일 거라고 했잖아요. 내 말이 맞죠?"


한껏 흥분된 아이의 목소리가 드높다.


남편이 근처로 차를 가져오기까지 기다리는데 새 물병을 목에 걸고 가방까지 멘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언제 저리 컸나 싶다.



"아빠, 배 고파요. 죽 사주세요. 보말죽."


죽을 즐겨먹지 않는 아이인데, 집 근처의 보말죽은 아주 잘 먹는다. 하지만, 우리 부부도 배가 고팠던 터라 공항 가까운 곳에서 허기를 면하기로 한다. 유명한 해물탕 집인데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듯 보다. 홀 안의 3/2가 중국인이고 주문을 받는 직원조차도 한국말로 주문을 하면 제대로 주문을 받은 것인지 미심쩍은 마음이  정도이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핸드폰을 쥐어다. 기내에서 잘 참은 대가이기도 다.


직원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조개껍질을 가리키며 "잇츠 노노!"라고 아리송한 영어 말한다. 조개껍질은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진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찌개에서 꺼내지 말라는 말인가 보다,라고 추측만 했을 뿐이다.



"You mei you MIfan? [:여우 메이여우 미판]

공깃밥 있어요?"


참고로 내 전공은 중국어이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밥을 가져다준다. 국물 맛이 제법 시원하고 해산물도 신선했지만, 한국에서 중국인들을 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는 않다.


우리는 외국에 가서 영어 또는 그 나라 언어로 주문을 한다. 그것이 예의라고 여기든 체면을 위해서든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곳의 중국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중국어로 주문을 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심사가 뒤틀다. 중국인이라면 그래도 괜찮다는 마인드를 가진 것이 부럽기도 하면서 한국을 얕보는가 괘씸하기도 다. 자국 내 갑질 마인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중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맛집에 중국인이 몰려온 것일 게다)



집 앞에서 보말죽을 찾는다. 남편과 내가 공히 인정하는 보말죽 맛집이다. 보말칼국수, 보말죽 유명 맛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이는 어른 분량의 한 그릇을 거의 먹어치운다.


그제야 집이 눈에 띈다. 생각보다 깨끗하다.


"어? 이번엔 조금 깨끗한데?"


오기 전부터 집 정리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차다.


"이번엔 미리 좀 치웠지. 그러니깐 다른 건 눈 감아줘."


이제 다시 온 가족이다.


주말마다 시간이 흐를까 봐 조바심내고 시계만 보았던 그날들은 당분간 접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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