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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Jan 08. 2019

멘탈가출자의 방황기(오타루에서)

오르골당, 기타이치가라스, 오타루운하




오타루.


雪國을 실감할 만큼의 많은 눈이 내렸다. 삿포로에서 눈보라를 뚫고 이곳까지 왔는데 오타루는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바다 근처라 엄청난 바람도 함께 불었다. 모자를 쓰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타루까지 오면서 살짝 짜증이 좀 났었는데, 근사한 경치를 보는 순간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었다. 눈까지 오니 날이 더 빨리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우선 호텔 체크인을 했다. HOTEL SONIYA.

더블룸이어서 굉장히 넓고 좋았다. 호강하는 느낌과 함께 '이래서 여행에서 숙소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운하 변에 있는 방을 얻으려고 본래 예약된 것에서 500엔을 더 지불했다.(본래는 800엔이었는데 협상해서 500엔으로 깎았다.)


무장을 하고 나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그곳의 예쁜 가게들이 6시면 문을 닫는다 하기에 걸음을 재촉해본다.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고, 엄청난 높이의 눈이 쌓여 있었다.



목적한 곳은 오타루 오르골당 본관, 그리고 키타이치가라스3호관.  


가는 길에 유명한 초코렛샵 르타오도 지나고 복을 부르는 각종 인형들이 있는 후쿠로샵도 들렀다. 가게 앞에는 저마다 이쁜 눈사람을 만들어 두기도 하고 알록달록한 구슬과 유리공예, 각종 마스코트들로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한다.  



오타루를 보기 위해서는 주로 메르헨교차점을 기점으로 하지만 난 숙소가 정반대 방향이므로 보면서 내려갔다가 다시 숙소로 올라오는 길을 택했다.


메르헨교차점 그리고 오르골당




오타루 오르골 당.


드디어 도착한 오타루 오르골 당.


그가 말했었다.


황홀할 거예요


그 말이 딱 맞았다. 노란 조명에 영롱한 멜로디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와 보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사람들도 거의 없다.   

눈 내리는 오타루 거리를 노오란 가로등만이 밝히고 있었을 뿐이다.  






아! 운하!


운하를 봐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야간 조명이 들어왔으니 이제 제대로 그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짧고 작은 운하의 모습에 잠시 실망했다.  그래도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담았다.  



이런...! 너무 예쁘다.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사진 속 모습이 실제를 따라오지 못해 항상 안타까웠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눈을 감고 머릿속에 새겼는데, 이상하게도 여기는 사진이 더 예쁘다.  


 


순간 멍해졌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늘 생각해왔다. 보이는 것보다 그 속에 담긴 것이 중요하다고.  


보이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외면할 수 있으므로 늘 경계해야 한다고. 그래서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나를 스스로 '부족하고 덜 자란 어른'으로 치부해버리며 살아왔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이 좋지만 어쩐지 그런 사람은 속은 비어 있을 것 같고 내가 모르는 어떤 치명적인 악(惡)함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다가오면 나는 주춤하곤 했다. 저렇게 멋진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 다른 저의가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애써 '넌 나에게 안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다'라는 말로 밀어내고 그 후로 내가 더 아파했었다. 마치 향수를 뿌리는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처럼. 어쩐지 세련된 감각을 가진 사람은 그 마음마저 세련되어 버려서 지나친 쿨함이나 자유로운 연애로 나를 아프게 할까 봐  다 부정해 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까 헷갈린다. 도대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진 속 오타루 운하는 너무 예쁜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은 나에게 충분한 행복감을 선사해준다. 그것이 오타루가 가진 본질적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타루 운하는 짧고 작고 볼품없는 모습 그대로이다.


본질은 그대로이다. 그저 다르게 보여질 뿐.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 본질'과 '가공한 실제'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에 행복을 느끼는 가에 있다.  


난 가공한 실제를 보고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고, 그것이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경시하는 마음을 낳지도 않는다. 사진 속 모습이 더 예쁜 운하는 볼품없는 모습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으므로 나는 마냥 행복해하면 될 뿐이다.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나다.  


운하가 나에게 아주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제 용기를 내어 상대의 진심을 읽으리라. 그것만으로도 난 여기에 온 충분한 보답을 받은 듯 여겨진다.  




  
이미 거리엔 사람들이 없다. 다시 나 혼자다. 이래서 시골이구나. 내 키보다 높은 눈들이 쌓여있고 하늘에서는 어지러운 눈이 내리며 노오란 가로등이 근사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다. 


눈만 감아도 그 모습이 선하다. 그 기억으로 또다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고맙다. 오타루.

고맙다. 삿포로.  그리고 노보리베쯔.  


오타루 운하




이튿날 아침.



숙소에서 내려다 본, 오타루 운하의 새벽


일본에 온 지 며칠 되었다고 긴장을 다 풀어버린 탓일까. 공항으로 가는 기차 편을 미리 알아두지 않고 잠들어버린 것이 화근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있는 공항철도가 없다고 한다. 다급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래 봤자 비행기 놓치는 거지'하는 여유가 샘솟는다.  


그래, 그뿐이다. 사람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저 돈 조금 더 쓸 뿐이다. 그 돈 때문에 내가 이 여행에서 굳이 애태우며 안 좋은 기억을 갖는 것보다는 낫다.  


호텔 지배인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테이네(手稲)에서 환승해서,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분명 여유가 생겼음에 틀림없다. 평소 조바심이 나면 잠도 못 이루는 나로서는 '공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졸고 있는 색다른 나'를 발견하고 그저 신기할 뿐이다.


오타루 역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비행기 저 아래로 육지가 보인다. 바다로 근접했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한국이다.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찬란한 태양빛을 반사하는 바다와 내 고향 한국땅을 보니 갑자기 울컥해진다.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그만큼 외로웠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이 땅이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가서 안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온 안도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바다를 건너는 나는 그 전의 나와 다른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나는 눈물인 것 같기도 했다.  


'바보 같은 너는 여기에 묻는다.'


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인다.  


그 아름다운 곳에 바보 같은 너를 두고 왔다고. 이 바다를 건너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라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저 생사만 걱정하며 두려워하던 노보리베쯔. 오히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던 기억.  


노란 가로등 불빛 사이로 흩날리는 눈과 골목길 그리고 실제적 본질과 가공된 실제 사이에서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까 혼란스러워하던 나를 구제해 준 오타루운하 야경의 근사함.  


그 모든 것들이 흘러내린다. 내 눈물과 함께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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