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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Oct 31. 2017

신선한 생선은 구울 때도 비린내가 나지 않더라.

29. <기저귀 차고 제주 한 달> 22일 차




지나친 긴장은 몸살 같은 것을 몰고 오는가 보다. 일찍 잠이 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이 떠지질 않는다. 엄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찍 잠들었을 아이는 일찍부터 비비적거리기 시작하고,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엄마의 귀를 자극한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남편과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눈만 간신히 뜨고 있다. 퉁퉁 부은 내 눈을 보며, 남편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어제는 너무 무리했으니 오늘은 좀 쉬라는데, 무리한 일정 짜지 말고 보내라는 그 뜻은 알겠으나 아빠들의 이런 속 없는 말에 엄마들은 화가 난다. 아이가 있는데 쉬는 게 가능한가. 


“제가 그럴 팔자가 못됩니다, 남편.”


이라고 짧게 항의하니 돌아오는 건 웃음소리. 


창문을 열고, 현관문을 여니 오늘도 아이가 “엄마, 오늘 날씨는 어때?”라고 묻는데 제법 큰 아이 같다. 제주에 온 사이 벌써 이 만큼 성장한 거다. 이제 삶에서 '날씨'라는 것이 관심사의 일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네가 성장했다는 증거란다. 


뿐만 아니라 아침식사를 할 때면 “엄마, 오늘은 밥 먹고 어디 갈까?”라는 말도 요즘 아이가 날마다 묻는 말이다. 이제는 아침식사를 하면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과가 되어 버린 것도 있지만, 나에게 ‘어디 가요?’라고 수동적으로 엄마의 결정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디 갈까?’라며 능동적으로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도 성장의 증거이다. 


항상 몇 개의 대안을 들고 아이가 결정하도록 질문하지만, 오늘은 협재 바다에서 알게 된 RAIN맘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아이들 사진도 찍어줄 겸 도립 김창열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협재에 들러 그들을 픽업해서 미술관으로 향했다. 




바람도 불고, 날씨가 흐려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날은 따뜻하다. 본래는 도립 김창열 미술관으로 가기로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간 곳은 <현대 미술관>이고 김창열 미술관은 바로 옆 검은 건물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RAIN맘이 아이들에게 비눗방울 장난감을 쥐어준다. 잠에서 깬 아이도 비눗방울이 신나는지 연신 뛰어다니며 함박웃음이다. 미술관 본관으로 향하는 나무 길 위에서 비눗방울을 날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찍어도 그림이다. 얼마나 버블건을 눌러댔는지 본관에 도착했을 땐, 비눗방울액은 이미 소진. 



입구에 들어서, 입장료 1천 원을 내고 동선을 안내받은 후 입장했다. 김흥수 화가의 <해녀 아가씨> 그림이 우리를 처음 맞이한다. 동양미와 색채미가 뛰어난 작품들이 많았고, 대개는 누드여서 아이가 호기심을 가지고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엄마, 난나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네.”라면서 한 그림이 맘에 들어, 정확히는 색감에 반해 뛰어가고 손가락질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요사이 포도맛 아이스크림과 쥬스에 눈을 뜨면서 색깔도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아마 자신에게 달콤함을 주는 색깔이 보라여서 그런 듯하다.



‘오름에는 향기가 있다’라는 멋스러운 주제도 전시된 현병관 선생의 먹글(붓글)작품도 1~2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었다. 오름을 상징하는 그림과 함께 만들어진 작품은 단숨에 내 눈을 사로잡았으나, 계단 아래로 마구 내려가는 아이 덕분에 오래 감상하지는 못했다. 



1층을 내려다보니 벽면 한가득 ‘빛’이란 글자가 마치 수평선 위로 뻗쳐 나오는 일출의 모습처럼 찬란한 빛깔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용트림 같은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옆에 색깔한지로 만든 항아리 위에 글이 쓰인 작품도 있었으나, 워낙 알록달록 하니 아이들이 바로 손을 뻗기에 이를 제지하느라 제대로 감상을 못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에는 서낭당의 비단 헝겊이 매달린 것처럼 글귀가 적힌 수많은 종이들이 천장에 매달려 한국인의 ‘한’의 정서를 표현하는 듯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매우 좋은 글귀들이 쓰여 있었는데 글씨체로 보아 한 사람의 작품은 아닌 듯했다. 



이로서 본관 관람을 마치고 잔디마당으로 나왔는데, 밖에 전시된 재미있는 작품 덕에 아이들은 또다시 맘껏 뛰어놀며 관람할 수 있었다. 땅에 떨어진 솔방울과 나무 열매를 줍기도 하고, 평상 위에서 트램펄린에 올라탄 것처럼 뛰기도 하고, 네모 돌을 의자 삼아 앉기도 하고 아이들은 그들의 자유분방함을 즐겼다. 무지개 곰돌이, 앞뒤가 모두 꼬리만 있는 치타와 판다, 원숭이 얼굴을 한 양, 꽃 얼굴 표범, 상어의 얼굴과 지느러미를 가진 개구리, 꽃 얼굴 공룡, 토끼 같은 당나귀, 꽃 얼굴 프테라노돈 공룡 등 어른이 보아도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길을 따라가니 입술 모양 조형물 뒤에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연못도 있고, 그 뒤로 난 오솔길 끝에는 좀 전에 보았던 현병관 작가의 공방 같은 건물도 있었다. 이정표를 보니 그 뒤로도 먹향기나눔터, 탐묵헌, 종이의 집 등 다양한 작가들의 공방 또는 전시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아이들의 컨디션으로 인해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 옆에 별관이 있으니 들러보라는 직원의 말이 생각났지만, 아이들은 이미 배가 고파 짜증이 난 상태였다. 가까운 곳에서 밥을 먹이려고 처음 들른 곳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거기서 멀지 않은 국수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당말(혹은 당몰)저지오름국수.(당말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어디선가 몸국을 '아래 아'자를 사용하여 ‘몸국’이라고 표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저지오름 입구에 있는 가게로 멸치국수, 고기국수, 비빔국수, 회비빔국수를 팔고 계절메뉴로 콩국수와 열무국수를 파는 그야말로 국수전문점이다. 오름을 다녀오는 손님들의 목축임 용도로 간단한 주류도 판매하는 듯 보였다. 



동네 식당답게 가격도 저렴하고, 맛만 좋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고기국수를 주문했다. 제주에 와서 ‘고기국수’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만큼 제주를 대표하는 국수가 바로 고기국수인데, 가끔 먹는 설렁탕을 빼고는 고기 국물로 낸 음식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 나도 고기국수의 비리지 않고 깔끔한 맛에 제주에 올 때마다 먹었던 것 같다. 고기국수 맛집이라는 ‘삼대국수’, ‘자매국수’, ‘올래 국수’에 모두 다녀봤는데, 모두 맛있었고 또한 각자의 매력이 있었기에 이 곳 저지오름 국수는 솔직히 상대적으로 기대가 덜 되었다. 



하지만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까. 깔끔하게 맛있어서 아이도 잘 먹었고, 결과적으로는 힘들여 국수 맛집 찾아다니지 않아도 제주 고기국수는 다 맛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수를 먹고 어른들의 휴식을 위해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협재 쪽 카페를 찾아봤으나 아이들과 함께 갈 만한 곳으로 야외 공간이 있는 카페를 찾았으나 앤트러사이트, 블랙스완씨 등을 후보에 올렸다가 결국은 금능 ‘행자네’라는 곳으로 결정했다. 



‘행자네’는 여행자의 줄임말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카페는 아니고, 근처 도민들이나 올레꾼들이 지나다 들르는 모양인지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길가에 차를 세우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나무그네가 있어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 들어갔다. 


내부엔 술 손님이 있어 뒤꼍으로 나가니 감자밭을 배경으로 너른 공간이 탁 트여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기에 딱 좋았다. RAIN맘과 나는 동시에 빙수에 마음이 갔다. 한라봉빙수는 지금 안된다고 해서 제주팥으로 만든 빙수를 주문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그네도 타고, 일인용 의자에 멋스럽게 앉아 있기도 했다. 혼자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고, 2층 테라스로 올라가자 막힘없는 전경이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들었다. 



이윽고 나온 팥빙수는 제주팥으로 직접 삶아 만드신 수제 팥과 팥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얹어서 나온 우유빙수였다. 한때 남편과 연애시절, 빙수에 마음이 꽂혀 빙수 맛집을 찾아 돌아다닌 적이 있어 빙수에 관한 애정이 남다른 나는 기대를 가지고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런데, 실망스러웠다. 이유는 아마도 요새가 빙수 시즌이 아니다 보니 냉장고에 좀 오래 보관된 듯한 우유얼음과 아이스크림의 향취 때문인 듯했다. 냉장고에 보관이 길어지면 흔히 말하는 냉장고 맛이 배어버리는데 그 맛에 유독 반응하는 나로서는 먹는 내내 냉장고 맛(?)이 느껴져서 결국엔 팥만 떠먹게 되었다. 쥔장분들의 성품을 봐서는 말했으면 어떻게라도 조치를 취해주셨을 것 같기는 한데, 음식점에서 음식 맛을 가지고 대놓고 품평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뒤꼍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챙겨간 공룡 장난감으로 역할놀이를 하기도 하고, 서로 그네를 밀겠다고 투덕 거리기도 하고 난간에 겁 없이 매달리기도 하면서 희희낙락한 시간이었다. 멀지 않은 주택가에서는 지붕에 올라가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참으로 위태해 보였지만, 아마 우리들의 어린 날에도 분명 저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 마냥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는 바람이 불고 조금 쌀랑해져서 짐을 챙겨 안으로 들어왔는데 안쪽도 따뜻한 분위기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메모가 내부의 중간 벽을 만들고 두 파트로 나뉜 공간의 한쪽에는 바Bar형 의자와 테이블이, 다른 한쪽에는 식사와 술이 가능한 일반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말로만 들어서는 바형 의자와 테이블은 어찌 좀 불편할 것 같은데 막상 앉아보면 아주 편안하다. 



아이들은 그곳에 앉아 메모지에 열심히 뭔가를 끄적거렸는데 마치 꼬마 연인 둘이 카페 데이트를 하는 것 같다며 어른들은 웃었다. RAIN맘이 물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갔더니 물 대신 직접 만든 감귤쥬스를 주셨다. 덕분에 겸이도 한 잔 마시게 되었는데 그 맛이 진짜 일품이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천연의 단맛에 상큼함이 느껴지는 귤 맛. 나도 모르게 RAIN맘에게 “이건 진짜 맛있다”라고 말하자, 그녀도 동의했다. 이 곳에 들르게 되면 꼭 귤 쥬스를 맛보리라. 쇠소깍에서 맛보았던 한라봉쥬스도 꽤 맛있었는데 그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었다. 



우리가 먹은 빙수도 시즌 때 왔으면 감탄했을 맛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나왔다. 





RAIN네를 데려다주고 우리는 근처 한림 하나로마트에 갔다. 우리 동네에서 갈 수도 있었지만, 하나로마트라도 동네마다 다를 것 같아 구경삼아 들러보았다. 규모는 가 본 중에 제일 작았지만, 주민밀착형 마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직원과 손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정겨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 봉지 외상 해 갈게.”

“안 갚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간다.”

“00 엄마 무서운 거 내가 모르나.” 


마트 외상은 떠올려본 적 없는 나로서는 배시시 웃음이 났다.


저녁 때라 이곳도 사람들로 붐빈다. 하지만, 하귀 하나로마트처럼 주차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아 마음이 편했다. 저녁에 뭐를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반짝거리는 갈치가 눈에 띄었다. 제주 와서 갈치 한 번 못 구워줘서 계속 마음에 걸리던 차다. 비싸기도 하지만 마트보다는 왠지 오일장에 가서 사면 더 싱싱하고 쌀 것 같아서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은빛 옷이 손상하나 없이 말끔한 갈치를 보니 아무래도 사야겠다 싶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옆에서 백조기를 사서 손질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5천 원 더 주고 굵은 놈을 사라며, “요건 그냥 구워서 양념장만 발라먹으면 끝나.”라고 말씀하신다. 양념장에 대해 물으니 내 말투를 보고 아셨는지 “육지에서 왔구먼.”하시며 양념장에 대해 설명해주시고는 나를 대신하여 구이용으로 손질하라며 소금은 얼마나 뿌리는지에 대해까지 말씀해주셨다. 그 덕에 제대로 된 갈치를 살 수 있었다. 


아이를 예뻐하시는 할머니와는 계산대에서 다시 마주쳤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할머니가 뭐라고 했냐고 계속 질문하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겸이 예쁘다고 인사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어.”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며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오자마자 갈치를 굽는데 전에 쏠이 할머니께서 '신선한 생선은 구울 때도 비린내가 안 난다'고 하시더니 정말 그랬다. 양념장을 위해 마당에 나가 파를 대신할 부추를 뜯어다 간단하게 양념장을 만들었다. 구운 갈치 한 토막에 양념장을 바르고 접시에 내었다. 



배가 고프다기에 다른 반찬 없이 생선만 해서 주는데 잘도 받아먹는다. 가만 보면 이 녀석은 흰살생선을 더 좋아하고, 입맛이 정직해서 비싸고 신선한 생선일수록 확실히 잘 먹는다. 먹어 달라 구걸하지 않아도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는 마트에서 사 온 빵까지 먹는다. 잘 먹는 걸 보니 잘 사 왔다 싶다. 


낮잠도 거의 못 잤기에 목욕을 씻기고 일찍 재우려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제의 피로가 안 가셨는지 피곤이 몰려왔다. 책을 몇 권 읽어줬지만 생각 외로 아이는 멀쩡했다. 결국 아이는 잠들기 전까지 혼자 노래를 부르다 잠들었다. 낮에도 틈만 나면 불렀던 ‘둥개 둥개 둥개야. 두둥둥개둥개야. 날아가면 어쩌나 두둥둥개둥개야’ 노래를. 잘 때 불러줬던 노래냐고 RAIN맘이 물었을 정도로 하루 종일 부르더니 잠들기 전까지 이 노래다. 흥이 참 많은 아이다.     





Epilogue

{오늘의 가계부}
제주 현대미술관 입장권 1천 원
고기국수 6천 원(RAIN맘이 계산)
편의점 3천 원
제주 팥 우유빙수 6천 원(라지 사이즈 1.2만 원으로 내가 계산, 스몰 사이즈 7.5천 원)
한림 하나로마트 3.2만 원



Today's meal

-조식: 냉동 산적 +계란후라이 +계란찜

-중식: 고기국수

-석식: 갈치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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