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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고가 싫었던 이유, 공고에 발령받은 이유

by 공고초보

- 얘들아, 수업 시작 종 쳤다. 이제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라.

- ..... (와글와글)

- 얘들아? 앞에서 선생님이 말하고 있잖아? 빨리 빵 껍질 치워!

- ...... (아무도 선생님 -나- 에게 대답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계속 떠들고 있음)

- 야 이 개새끼들아!


그리고 나는 교탁 옆 책상을 뒤엎었다. 책상과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었다. 뭐야? 고작 저런 걸로 겁먹을 줄 아나봐? 가소롭다는 듯이 여전히 빵과 과자를 널어 놓고 먹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눈이 번쩍 뜨였다. 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신규 때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꾸던 그 꿈. 아무리 훈육을 하려 해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교실 한 가운데에서 나만 바보가 되는 꿈. 꿈 속에서 마저도 나는 철저한 '을'이었다. 고등학교로 옮기면서 무의식 중의 무의식으로 사라졌던 그 꿈을, 새 학교의 전 교사 출근일 첫 날 새벽 다시 생생하게 꾸었다. 끔찍했다.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또 다시, 나와 정상적 대화가 되지 않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그렇게 싫어 승진가산점이 넘치는 학교에서 도망쳤는데도 결국은.


나는 경기도에서 임용시험을 치렀다. 내 첫 발령지는 내가 나고 자란 도시 A에서 자차로만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곳이었다. 겨울에는 자취방 문이 모두 얼어붙어 출근지 못할 뻔 한 적도 있었던, 장마철에 조금이라도 비가 많이 내릴 때면 학교 앞 장터에서 사 둔 고무신을 신고 출근하던 그런 곳. 그 학교에 처음 방문하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70년대 재연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구멍가게와 문구점이 줄지어 있었고, 골목길의 가장 안쪽에는 다 쓰러져 가는 교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늦겨울 햇살이 **중학교라는 현판을 비추고 있었다. 그 곳은 요즘 드문 남자 중학교였다. 이름이 동일한 **여자중학교가 샛길 건너 바로 옆에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평생 믿어본 적 없는 신을 찾아 부르짖었다. 신이시여, 그 흔한 마트 하나조차 찾을 수 없는 이 산골짜기에 날 떨어뜨려 놓을 거면, 차라리 저 여자 중학교에 가게 해주시지, 왜 남자 중학교에 가게 신 겁니까.


난 어렸을 때부터 남자 일진들을 싫어했다. 학창시절 공부만 하던 날 그들 역시 좋아할 리 없었다. 지나가며 내게 했던 말들을 종합해보면, 나를 공부만 하는 찐따로 여겼던 것 같다. 지금처럼 학교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은 아니라서 나와 대놓고 부딪치는 아이들은 없긴 했지만, 나랑 그들은 그냥, 결이 달랐다. 그런데 그 애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라고? (이건 내가 공고에 발령받은 것이 너무나 싫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철 들지 않은 남자 일진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


**중학교에서의 2년은 악몽 같았다. 물론, 예쁜 아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 기억나는 에피소드들은 다 그런 것들이다. 자기 삼촌이 이 동네에서 제일 가는 조폭이라며 이레즈미 문신을 자랑하던 녀석, 수업 시간에 배가 고프다며 컵라면을 끓이던 녀석, 수업 시간에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져 놓고는 선생님은 도대체 아는 게 뭐냐며 나를 무시하던 녀석...... 나는 지금도 관광 명소로 유명한 그 동네에 발도 들이지 않는다. 물론 앞으로도 평생 그 곳에 갈 계획은 없으며, 죽은 후의 내 영혼도 그 곳에만큼은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라는 공간 자체를 증오했다. 이제와 변명하자면, 어쩌면 그저 학교에 나와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던 그 아이들의 삶, 고작 십몇 살 슬픈 인생들을 이해하고 감싸기엔, 나도 사회 생활을 갓 시작한 2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였다.


경기도교육청 소속 교사는 한 학교에서 2년 이상을 근무하면 정기전보(내신)를 쓸 수 있다. 한 학교 근무 경력이 4년을 초과하면 정기전보를 썼을 때 무조건 발령이 나지만, 4년 이하일 경우에는 발령이 안 날 수도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서 2년을 채우자마자 내 고향 A시로 전보를 썼다. 발령이 나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위해서 무언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그 학교의 모든 선배 선생님들이 날 말렸다. 3년만 더 참았다 나가면 승진가산점 다 채우고 나갈 수 있어... 너 선배들 말 안 들은 거 10년 후에 후회할 거야... 40대 되어서야 일부러 여기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아...... 워낙 시골이고 교사들이 안 오려 하는 곳은, 근무하는 것 만으로도 근무 년수에 비례하여 교감 승진에 도움이 되는 가산점을 받는다. 아직도 이 제도가 경기도의 벽지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고, 실제로 교감 승진 시 중요한 부분이기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교감 승진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1개월이라도 여기에 더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서두에 썼던 끔찍한 꿈을 매일 꾸었다. 일어나는 순간마다, 교실 하나 통제하지 못해 괴로워서 꿈까지 꾸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실제로 교실에서 꿈과 비슷한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했고, 나는 무력했다. 천만다행히도, 교육청은 내 요청을 받아주었고, 나는 고향인 A시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을, 나는 A시의 고등학교 교사로 살았다. 물론 매년 힘들었지만, **중학교에서의 2년에 비하면 천국 같았던 시기였다. 10년이 지나자, 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경기도의 교사들은 한 지역에서 10년을 재직하면 반드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그 사이에 나는 가정을 이루어 남편과 아이가 있었고, 그래서 멀리 갈 수 없었기에, A시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B시를 1지망으로 하여 정기전보를 썼다. 이렇게 자신의 지역 자체를 옮기는 것을 '관외내신'이라고 하고, 동일한 지역 안에서 학교만 옮기는 것을 '관내내신'이라고 한다. 문제는 어느 지역이든 '관내내신'이 '관외내신'보다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1지망인 B시에 발령이 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나는 지역을 A에서 B로 옮기는 '관외내신' 대상자였기에, '관내내신' 대상자들이 모두 발령을 받은 뒤 남은 학교에 배정을 받아야 했다. '관내내신' 대상자들이라고 해서 공고, 상고 같은 특성화고를 선호할 리가 없다. 따라서 결국 특성화고 자리는 나 같은 '관외내신' 대상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관외내신 대상자들은 내가 옮기고 싶은 '지역'은 쓸 수 있으나, 그 지역 내의 '학교'까지는 쓸 수가 없다. 어차피 남는 자리에 배정되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청에서는 최대한 관외내신 대상자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임지 희망서'를 받는데, 현재 생활 근거지와, (이 부분은 교육청마다 다른데 내가 전입한 교육청에서는) 가고 싶은 학교급 -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 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중학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은 나는 중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기에, 무조건 고등학교로 배치해 달라는 희망서를 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특성화고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멍청하게도 중학교가 싫다는 생각만 했지, 중학교에서 하위 20%가 진학한다는 특성화고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고의 전 교사 출근일 첫날, 시청각실로 향하며 나는 기억 속에 억지로 묻어 두었던 **중학교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렘은 커녕 불안과 걱정만이 밀물처럼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가족들 앞에서 특성화고도 경험이야, 교직 생활에 한 번쯤은 경험해볼만 해, 하고 큰 소리 쳤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매우 움츠러들었고 떨렸다. 이 나이에, 이 경력에, 별 같잖은 애들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까봐.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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