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물둘레의 노래

Tat Tvam Asi

by 여상

[ 물둘레의 노래 ]

동그랗게 내 파동이
동그란 당신 안에 들어섰을 때
이제 나만의 마음이
아니었어요


잠시 경계를 둘러쳤지만
당신을 만나는 순간
울타리는 무의미해졌지요

곧 사라지겠지만
이 순간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잊혀지겠지만
우리 만난 마음이
끝없이 퍼져 갑니다

새들의 노래로
나무들의 나이테로
냇가의 물결로
아이들의 웃음으로

동그랗게 동그랗게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깔리고, 드세진 않지만 벌써 바람이 차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넉넉하게 차오른 개천물이 평소보다 큰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강바닥을 쓸고 바위를 두드리며 흐르는 물소리는 고오오오 신비한 진동으로 대지와 공간으로 퍼져 나간다. 화음을 맞춘듯한 숲의 공명음이 산과 대지에 가득하다.

추워지기 전에 생장을 좀 더 해두어야 하고, 애써 낳은 열매들을 키워야 하는 나무들에게 가을비는 조용한 응원이다. 비를 맞으며 새 몇 마리가 쉴 곳을 찾아 날아가고, 새들이 날아간 하늘 아래 잘 영근 감들이 주황색으로 익어간다. 초록빛이 바래가는 이파리 사이에서 석류는 더 강렬한 검붉음으로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다.


툭! 고요한 공기를 울리며 감 하나가 떨어진다. 끝까지 매달려 익어가는 감이나, 빗물의 무게에 떨어진 감이나, 아쉬울 것은 없다. 잘 익은 감은 사람들의 행복한 간식이, 떨어진 감은 땅 아래 사는 작은 것들의 풍성한 성찬이 될 것이므로.


가을감02.jpg




흥건하게 젖은 바닥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은 수면의 여기저기에 물둘레들을 만들고 있다. 작자미상의 음악처럼 짧은 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작은 파문들, 언뜻 뭇 생명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왜 일까? 대자연 아래 우리 생명들도 인연 따라 여기저기에 생겨났다가 금세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니 그 짧은 생애의 물둘레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이뻐 보이기도 해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나마 한 점으로부터 동그라미를 키워 어여쁜 경계선을 만들어 낸 물둘레들은 그 하나하나가 소중한 우주이다.

정해진 자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퍼져 나간 동그라미들은 수시로 겹친다. 파문은 겹치면서 조화로운 교집합을 만든다. 서로 관계하면서 또다름을 자아내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세상사와 닮아 있는가!

완벽하고 아름답게 동그랗지만 물둘레들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다른 생물들에 비해 이기적이라 할 만큼 긴 수명을 가진 인간의 한 생애도 우주의 시간 안에서는 한 방울 빗물이 자아낸 물둘레의 순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물둘레02.jpg fr. PixaBay


파동은 생겼지만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날이 바뀌어 비가 그치고, 바닥이 마르고, 며칠이 더 지나고 나면, 거기에 무언가 생겼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어여쁜 물둘레의 파동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선과 기억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것들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의미였을까?

대우주의 품 안에서는 어떠한 파동도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이 그것을 증명한다. 파동은 파동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시 영향을 미치며 순환한다.
오늘 만나고 목격한 물둘레의 파동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개별적 존재로서 잠깐 세웠던 경계도, 사는 동안 일렁일렁 일으킨 영향의 파장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파장이 되어 순환한다. 사라지는 것도 나타나는 것도 아니라 순환하는 중이었을 뿐이다.



고대철학에서는 우리 존재가 개별적이고 유한한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뭐란 말인가?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Tat Tvam Asi'
산스크리트어 Tat는 '그것'을, Tvam은 '너' 또는 '너 자신'을, Asi는 '~이다' 또는 '존재한다'를 의미하므로, 따라서 이 경구는 문자 그대로 '그것이 바로 너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그것'은 절대적인 실제이자 근원인 브라흐만을 의미하고, '너'는 개인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을 의미한다고 한다고 하니, 이것을 전문적이지 않게 도용한다면, '우주가 곧 나이다' 또는 '내가 곧 우주이다'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단타 철학의 엄중함에게는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유롭고 격식 없는 상상으로 이렇게 노래를 불러본다.
"우리가 바로 우주야.
물둘레이자 물이고, 파도이자 바다이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형상이 아니라 영원히 순환하는 생명 그 자체라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리고 상쾌해진다.

그래, 나는 우주다. 우주가 나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어나면 거울에 비친, 부스스한 머리에 얼굴이 퉁퉁 부은 우주를 보게 되는 것이로구나. 커피를 마시는 우주, 파스타를 만드는 우주, 설거지하는 우주, 가끔 신나다가 우울해하는 우주.

거창한 깨달음이라는 것이 결국 오늘도 별일 없이 살아가는 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는구나. 물둘레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하루가 영원히 순환하는 우주의 한 박자라니.

비가 내리고, 개천물은 흐르고, 나는 여전히 이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식당을 하며 살아간다. 이토록 소박한 우주라니, 대만족이다.

내일도 우주는 일어나서 커피를 내릴 것이고, 손님을 맞이할 것이고, 물가를 산책할 것이다. 이 상쾌한 느낌은 곧 희석되겠지만 그래도 가끔 빗방울의 물둘레를 만날 때면 문득문득 생각이 나지 않을까?


"아, 맞다. 나는 우주였지!"



keyword
이전 29화가을을 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