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세이
[ 가을을 내리다 ]
커피 한 잔 내리듯
시간 천천히 가는
그런 하루를 살고 싶다
텁텁한 마음 걸러내고
쓴 듯 단 듯 맑은 향
그런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다
어젯밤 별빛 담긴
맑은 물을 길어다
곱게 간 사연에
가늘게 부어
아픔 조금 씻어내고
그리움은 조금 더해
창밖으로 익는 가을
마음 가득 향기로운데
허물 같은 상처는
가을색으로 덮어주자
오늘도
커피 한 잔 마시듯
아무 일 없는
그런 하루를 살고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50대 이전까지 나는 커피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젊은 시절, 나에게 커피란 고단한 사무실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처럼, 마지못해 책상 앞에 앉기 전 뜸을 들이는 시간을 위한 그럴듯한 핑계 같은 것이었다.
기다란 봉투를 찢어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훅 피어오르는 단내. 설탕과 크림가루가 섞인 믹스커피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신호탄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루할 때, 긴장될 때, 업무상 누군가와 마주 앉아야 할 때처럼 커피는 기능적인 필수품처럼 내 곁에 있었다. 그것이 커피였을까?
한창 사업을 꾸려 나가던 40대 시절, 거리 곳곳에는 유명 커피체인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무실이 모여 있는 테헤란로 거리에는 녹색 로고가 박힌 컵을 들고 걷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 시절에는 주로 카페라테를 마셨다. 지치거나 무기력해졌을 때, 한 잔의 우유커피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힘도 조금 나는 듯했다. 커피의 각성 효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달달한 시럽이 주는 위안 때문이었을까?
심신이 늘어질 때는 가끔 정신이 번쩍 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기도 했다. 진하고 쓰게 느껴지던 한 방의 펀치. 일과 속도와 성과로 점철된 나날들 속에서, 그 시절 커피들은 기능적으로나마 나에게 각성과, 때론 숨돌림의 위로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영광과 시련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주류 대열에서 밀려난 즈음에 다시 커피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처음으로 커피 향기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가야산으로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해인사를 찬찬히 둘러보고 나오는 길, 사찰 입구 노변에 자리한 작은 카페에 발을 들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많았고, 딱히 서두를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을 햇살이 창가로 스며들고, 마당의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는 오후였다.
메뉴판에는 여러 종류의 싱글 오리진 커피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케냐 AA, 과테말라 안티구아...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가격은 일반 음료보다 조금 비쌌다. 타이틀에는 '핸드드립 커피'라고 적혀 있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시간이 있었고, 마음이 허전해 있었고, 무엇보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무엇으로 내려 드릴까요?"
주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원두를 잘 모릅니다. 뭐가 좋을까요?"
"산미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구수한 풍미를 좋아하실까요?"
"구수한 게 좋겠네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원두를 골랐다. 설명을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무난한 콜롬비아 산이 아니었을까? 드르륵 드르륵...핸드밀로 원두를 분쇄하는 소리, 갓 갈린 원두의 향이 앉은 자리까지 퍼져 왔다. 깊고 그윽한... 형언하기 어려운 원두향.
주인은 드리퍼에 필터를 올리고 원두를 담았다. 작은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부어 내리자 잘 갈린 원두가 부풀어 오르며 꽃처럼 피어올랐다.
가느다란 물줄기로 원을 그리며,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중심으로. 서두르지 않는 손놀림, 조급하지 않은 시선, 그것이 마치 어떤 진지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한 방울 한 방울, 갈색의 액체가 서버로 떨어진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온 세월 속에서, 이토록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조금 식혀서 드세요. 너무 뜨거우면 향이 잘 안 느껴지거든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받아 들었다.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림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커피가 적당히 식었을 때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가자, 입술에 닿기도 전에 커피의 향이 코끝으로 먼저 마중을 나온다. 깊고 그윽한, 그러나 부드러운 향. 한 모금 머금자 입안 가득 풍미가 돌았다. 진하지만 거칠지 않고, 부드럽지만 뚜렷한 향미. 주인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 그 커피의 개성적인 맛들 - 초콜릿의 느낌, 견과류의 고소함, 캐러멜의 단맛 - 을 느껴보려 했지만, 내게는 그저 긴가민가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수하고 향기롭다는 것, 그리고 위안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커피 맛에 대한 아마도 나의 첫 느낌이었을 것이다.
"좋은 커피, 잘 마시고 갑니다."
주인장의 자상함이 고마워, 다정하게 인사를 남기고 카페를 나섰다. 사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도 입안을 코팅한 것처럼 커피 향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혀끝에, 입천장에,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향미.
'오! 커피가 이렇게 향기로운 것이었나?'
가야산의 가을이 그윽하게 익어가는 풍경이 커피 맛과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 맛이 가을을 닮았네.'
그 시절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다 할 동기부여를 못하고 있었다. 새로운 방식의 삶을 꾸려야 했지만 뚜렷한 대안 없이 멍하게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멈춘듯한 시간의 틈 사이에서 만난 한 잔의 커피, 그것은 지친 어깨를 다독이는 위로였고, 어떤 의미의 전환이었다. 그날 이후 커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까.
지리산의 가을이 깊어간다. 인연을 따라 살다 보니 조용한 산마을에서 커피를 볶고, 내리며 살고 있다.
구름이 많은 서늘한 아침, 창밖으로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고, 산자락을 감싸고 있는 안개를 바람이 조금씩 거두어 가고 있다.
이런 아침이면 묵직한 커피가 좋아, 오늘은 만델링을 골랐다.
수마트라섬의 만델링. 깊고 무겁고, 흙내음 같은 것이 느껴지는 커피. 만델링의 소위 흙내음을 수용할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었다. 뭘 가지고 흙내음이라고 하는 건가? 커피와 친해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나름대로 받아들인 흙내음의 느낌은 일종의 촌티 같은 것이었다. 산골의 가을이 깊어가면 이 촌티가 생각난다. 구름이 낮게 깔린 날에는 이런 맛이 좋다.
주방의 큰 창문으로 가을 햇살이 스며든다. 나뭇잎이 물들고, 감과 석류가 익어가고. 어느새 공간을 가득 채운 커피향. 이 순간이 좋다.
'이만하면 됐어....'
커피 한 잔에 담긴 느린 시간. 오늘은 그것을 가을이라 부르자.
#가을 #커피 #느림 #자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