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도 상처란 언젠가 아물고 슬픔도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 그건 모두 한때의 일로 다 지나가버렸다.
541p
청나라가 막을 내리고, 신해혁명 이후 무질서와 혼란 속의 중국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구체성이 너무 뚜렷해 마치 소설 속 내용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대상을 그대로 옮겨 적은 어떤 이름 모를 이의 글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시대의 혼란을 표현하기 위해 그 어떠한 표현의 절제도 하지 않은 듯하다. 다소 불쾌하더라도, 눈살을 찌푸릴지라도 독자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 그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라고 묶어 놓은 채로 억지로 영상을 상영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흡인력과 몰입도를 자랑하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이야기를 주도한 핵심 인물을 과감하게 죽이는 것과 독자 대부분의 관심이 가 있는 인물에 대해 추가적인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저자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물 개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거시적 환경 요소가 아닌가 추측해 본다. 우리는 극도로 치밀하게 짜인 이 이야기를 인물에 의존해 읽을 수밖에 없지만, 결코 그 인물을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 어떤지 놓쳐서는 안 된다.
배경의 설정상 1900년대 초반의 중국을 다루고 현시점과의 차이가 불과 100년밖에 나지 않지만, 이야기 속 수많은 구성요소들은 마치 몇백 년 전의 무엇을 보는 듯하며, 엄청난 시간적 괴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공간적 배경이 중국의 주된 도시들이 아닌 외진 시골 마을임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 마을별로 미신을 필두로 한 전통들은 시공간적 분리감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이야기 속에서 내가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삶을 살아나가려는 힘과 사람 사이의 인정이었다. 도적이 언제 약탈하러 올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민병단을 조직하고, 납치된 가족과 이웃을 어떻게든 데리러 오려는 모습은 가히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생존하기 위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심지어 그들은 공동체적 의를 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의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행동을 살기 위한 발버둥쯤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보여준 삶의 태도에 대한 모욕과도 같다.
흡인력이 좋아 신나서 재밌게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지만, 막상 다 읽고 곰곰이 책을 복기해 보니, 떠오르는 건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이 살아갔던 시대와 그런 시대를 살기 위해 그들이 가졌던 삶의 의지다.
존재하지 않는 도시인 원청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 린샹푸의 모습과 어느 도시를 가야 할지 모른 채, 존재하는 도시들을 떠돌아 마침내 고향을 돌아온 샤오메이의 대비되는 모습을 보며, 존재의 유무 따위는 인간의 의지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오로지 스스로 설정한 목표 의식만이 그 인간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 100% 명확한 모습을 그리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다. 그런 불명확성이 우리를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걸 바치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진정한 의지가 아닐까?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명확하다면 그것은 아마 이미 이룬 일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불명확한 것은 이루지 못한 채로 이루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린샹푸가 존재하지 않는 도시인 원청을 향해 나아가듯, 불명확하지만 화창하고 빛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