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무서움과 그 사상에 자신이 부합하지 않는 걸 깨달았을 때의 괴로움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원칙을 죽인 것이다!
2년 6개월 전 대학생 때 무척 인상 깊게 읽고, 번듯한 직장인이 돼서 다시 집어 든 『죄와 벌』. 그 시절의 나는 어떻게 이 명작을 읽었었나 하며 서평을 뒤적이니, 그때도 명작을 읽었다는 쾌감도 있었고, 나름대로의 분석도 있어 꽤 괜찮게 썼구나 하는 평가를 하게 된다.
도끼로 잔인하게 노파를 살인하는 자극적 사건을 트리거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스포는 염두에 두지 않고 서평을 쓰고자 한다. 모종의 이유로 강도 살인을 한 뒤, 정신적 고통에 허덕이다 자수하고, 마침내 고뇌를 떨쳐내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어떻게 보면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 범죄 소설로서의 근본적 요소와 성장 소설로서의 전형이 어우러진다.
단연, 이 책의 핵심은 라스콜니코프의 살인 동기와 자수 동기를 독자 스스로가 정의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동기를 궁핍, 사상, 사회적 불만과 죄책감, 사상적 좌절 등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어느 것을 선택해서 그 범죄, 자수를 소명해도 틀렸다고 이야기할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바로 명작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사상적 살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입장이다. 2권에 들어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한 보편적인 측면에서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가 사상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살인을 저질렀을까?에 대해선 꽤 퀘스쳔 마크를 붙이고 싶다. 아마, 그가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 주장에 입각하여 해당 사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살인 그 자체와 살해당한 대상은 명확히 분리해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사상이란, 1권 후반에 서술되는 '범인-비범인 이론'과 더불어 그의 공리주의적 사상이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명확히 서술하자면, 벌레 같은 사람을 죽이고 그 돈을 더 좋은 곳에 쓰는 게 낫다는 공리주의 사상에 '범인'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그런 위인이고, 라스콜니코프 그 자신이 '범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이 두 사상이 합쳐져 결과적으로 노파 살해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인 동기는 사상적인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수를 하였나? 나는 좌절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나폴레옹과 같은 범인으로 정의하고 벌레 같은 노파를 살해하였으나, 살해 뒤 그의 정신적 불안정과 나약함이 스스로를 하여금 범인이 아닌 비범인으로 정의하게 내몰았다. 그렇게 그는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본다.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어떤 행위를 했는데 사실 별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 앞에 그에게 놓인 선택지는 자수와 자살 두 가지뿐이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자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경찰서에 자수하러 갔다가 다시 나온 그 시점에 소냐가 그 앞에 없었다면 그는 자수 대신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다. 무한한 사랑과 헌신 앞에 그는 자수를 선택하고, 유형소 생활을 하면서 그 사랑을 느끼고 마침내 깜깜한 미래에 한줄기 빛을 비춘다. 그렇게 성장 소설로서의 요건도 충족하게 된다.
예전의 독서에는 라스콜니코피의 '범인-비범인 사상'에 막연한 부정적 감정을 느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약간 다르다. 니체를 꽤 깊게 접하고 난 뒤라 그런지, 그의 사상 속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이 엿보이기도 했고, 조금은 거친 초인 사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로,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는 말이다. 범인은 살인을 해도 된다는 미시적 입장들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일정 부분 사람이 범인과 비범인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일정 부분 공감이 되기도 한다. 마냥 비범인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분명히 기반을 뒤엎는 범인들은 존재한다. 비범인들은 저항하거나 따라오거나이고.
재독의 큰 장점이 바로 책을 더 분석적이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으니 더 미시적인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그 부분들이 서사의 중대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한층 더 완성도 높은 독서가 완성된다. 요즘은 새로운 검증 안 된 책을 읽을 바엔, 검증된 책을 읽거나 다시 재독하는 것이 더 좋다. 『죄와 벌』은 그렇게 내 뇌리 속에 더 강하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