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 이외의 것인 듯하다.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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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갑옷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기사 아질울포,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하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다른 기사. 존재의 측면에서 다양한 결핍이 어우러져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나는 과연 그럼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자아성찰적 질문과 더불어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아 탐구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이야기다.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존재의 근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살아 있는 물리적 존재로써 존재하고, 인간 혹은 사람으로서 존재하며, 그 근간은 부모 혹은 종교가 있다면 그에 맞는 신적 존재라고 보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차원적 사고를 잠시 접어두고, '존재한다'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해보자.


여기서부턴 나만의 고찰이다. 나는 존재란 왠지 모르게 존재 이외의 모든 것으로 증명 내지는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쉽게 생각해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수식은 내 존재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나는 어느 회사의 회사원이며, 누구의 가족이자 친구다. 이렇게 존재 이외의 것에서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듯하다. 아마, 이런 사회와 범주의 울타리 속에서 타자적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비로소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정의해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는 게 일종의 나를 찾아가는 인간의 무한한 여정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생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들 안 한들 물리적 존재 자체는 명확한 사실이고, 그렇다고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 자기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하는가'라는 끝없이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왜 존재하는가?'라는 꽤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끝없이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런 성찰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는 자신의 존재를 놓쳐버릴 위험이 크다. 365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나조차도, 이따금씩 과거와는 놀라우리만치 변해버린 내 모습을 자각하고 놀라기도 한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존재시키고자 집요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내 존재가 입증된다고 굳게 믿는다면, 그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은 내 존재가 입증되겠지만, 그 이후의 내 존재는 (또 다른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허상에 불과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존재란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정립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는 배울 수 있다'라는 작품 속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나를 수식하는 모든 것들로 정립된 나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수식했던 것들이 사라져도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다. 이런 비역학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할 순 없을 것 같지만, 예시를 들면 꽤 쉽게 이해가 된다. A라는 회사의 회사원으로써 존재했던 나는 A라는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내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섭취한 음식이 이미 소화가 완료된 것처럼, 존재의 양분이 되었던 것들은 결코 되새김질 되어 토해내지지 않는다.


잘 정립된 존재는 그 어떤 것보다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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