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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호랭이 Jul 06. 2023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죽음을 끊임없이 고찰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삶의 노래





나는 현재 살아 있고, 과거에도 살았으며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죽음이 찾아와서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죽기 위해서?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죽어야 하나? 두렵다.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건 더 두려운 일이다. 그럼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가? 어째서지? 죽기 위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죽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막대한 탐구심이 가득 찬 지금의 나에게 이 책은 꽤 특별하게 다가온다. 몇 년 전 읽었을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크게 집중하지 않고, 서사나 묘사에 집중했기에 여태까지 그냥저냥 흥미롭고 인간의 심리 묘사가 치밀한 작품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읽어 보니 죽음에 대한 고찰을 소설로 완벽하게 승화시킨 위대한 작품으로 보인다.




한 개인의 죽음을 타인의 시점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내면의 시점으로 깊이 파고들어 죽음 그 자체에 대해 골몰하게 만든다.




나의 죽음과 그것이 타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라면, 이 작품 속에서 이반 일리치의 주변 인물들의 묘사가 꽤 비현실적이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지극히 현실에 기반한 것들처럼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나 이외의 존재의 죽음은 철저히 내 죽음과는 완전히 독립돼 있다. 겉으로 내비치는 슬픔 내면에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안도의 기쁨이 숨어 있다. 생명의 소멸 그 자체에 대한 감정보다는, 소멸로써 발생되는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들이 먼저 떠오른다. 즉, 자신과 관여된 일 내지는 이익과 결부된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나의 죽음'은 의도적으로 배제된 된 채, '남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죽음은 철저히 스스로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죽음에 침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가? 톨스토이는 이 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쳐 끝없이 매달렸다. 나 역시 그런 죽음의 불가피성, 나의 필멸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맞닿는다. 죽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지만,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에 논리적으로 규명하기 어렵다. 때문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삶과 죽음의 부정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무인식과 의미 부여.




죽음을 철저히 배격해 마치 나에게는 죽음이 도래하지 않는 것처럼 살거나, 나에게 다가올 최후의 순간을 받아들여 그 과정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던가. 나에게 삶이란 후자의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그 의미 부여를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측면에서 나에게 삶이란 최후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난 죽는 그 순간을 인식할 수 없기에, 이 의미 부여는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죽기 바로 전 급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갈망하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광명을 보았지만, 난 죽음이 어떤 명확한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되길 원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며 타인으로부터의 나오는 연민의 감정을 원했다. 결국 나는 각각의 개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받아들일 거냐, 무엇으로 그 끔찍한 필멸에 대항할 것이냐에 대한 화두를 던진 거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XX다.'라고 정의할 수 있으나, 그것은 오로지 각각의 개인에 국한된 정의다. 죽음의 의미, 즉 삶의 의미는 스스로 정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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