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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

덩케르크 후기

by 이이육
이것은 전쟁 영화가 아니다.


누군가가, 영화 홍보 포스터의 저 슬로건 때문에 "덩케르크"를 보러 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전쟁 영화를 기대하고 가서는 재미없는 다큐멘터리 한 편만 보고 올 것이다, 덩케르크의 실제 이야기는 구출 작전일 뿐이다, 그간 놀란 감독의 전투신을 봐오지 않았느냐, 대충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보면 이 정도 이야기들이 있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같은 팝콘 무비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로 하여금 "덩케르크"를 꼭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평소에 놀란 감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 영화를 개봉 당일 심야영화로 보게 되었다. 열대야가 심해서 그랬는지, 방학의 무료함을 덜어내기 위해 그랬는지. 의미는 결국 나중에 부여하는 것일 뿐, 별 이유 없이 보러 간 것이라 생각한다.


요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놀라는 일이 종종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씬, 예상을 뒤엎는 플롯, 단순히 그런 문제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갔는데, 말도 안 되게 유명한 배우가 스크린에 튀어나올 때, 깜짝 놀라곤 한다. 그래서 톰 하디와 킬리언 머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만 해 봐도 나오는 그런 걸 알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별다른 정보 없이 갔다. 알고 간 것은 당장 몇 줄로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놀란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전형적인 전쟁 영화는 아닐 것이다. 놀란 영화답게 사운드가 웅장한데, 그게 조금 과하다. 그런 이야기들.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알고 간 사실들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영화는 정말로 잔잔하고 현실적인 앵글로 전쟁의 순간들을 비춘다. 가감 없이. "덩케르크"를 비추는 카메라는 축구 경기장의 다이내믹한 앵글을 제공하는 카메라도, "콜 오브 듀티"같은 전쟁 게임처럼 보는 이를 전율하게 하는 카메라도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보는 내내 진짜 전쟁이란 다른 전쟁 영화들과는 다른, 이 영화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쾌감이나 전율이 느껴지는 순간은 그래서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공포였다. 화면 속의 인물들 위로 폭탄이 떨어져 가루가 돼 버리지는 않을지, 그들이 탄 배가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지는 않을지, 사방으로 좁혀 오는 적군의 총알 세례 속에 총에 맞지는 않을지, 그저 무섭고 걱정이 될 뿐이었다. 전쟁에 선 인간이 느끼는 심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갑자기 떨어질 폭탄에 대한 공포, 기습을 위해 매복해있을 적의 존재에 대한 공포,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습격당할 것을 걱정하는 공포, 그런 공포가 감정의 대부분이 아닐까?

이쯤에서 "사운드 과잉"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장면 장면마다 배경음악이 전쟁의 현장음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데, "사운드 과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서인지, 30분 정도 듣고 있으니 조금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덩케르크"인지, 아니면 꿈속의 꿈속의 꿈을 헤엄치던 "인셉션"인지. 그 정도로 배경음악은 강렬했고, 듣는 이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리고 그런 사운드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사운드가 사라졌을 때였다. 잔잔한 장면이었던가, 사운드가 빠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엄청난 편안함, 그리고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야 시종일관 신경을 긁어 대던 사운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스크린 속의 가감 없는 영상으로 실제 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 효과를 더욱 강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운드였던 것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장면 내내 깔리는, 듣는 이를 사정없이 괴롭히는 배경음악 덕분에, 관객은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도 전쟁에 근접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처참한 현실과 사투하는 각각 시간축의 주연들의 이야기를 내내 비출 뿐이던 106분의 다큐멘터리는, 마지막 6분 정도의 시간을 자신이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쓰였다. 그리고 그 극적인 순간의 연출이 가져다주는 전율은 엄청났다. 영화 내내 전장 한가운데 있는 경험을 선사하더니, 마지막 순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존재감, 그리고 "덩케르그"의 영화로서의 능력이 과시되는 순간이었다. 그 감동적인 순간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그 실화가 꽤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기에, 감동이 배가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기회가 된다면 아이맥스관에 가서 한번 더 보고 싶다. 아니, 보러 갈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이 영화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앞으로의 작품도 모조리 챙겨 볼 생각이다. 인셉션과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를 보고 감동했고,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인셉션이었다. 참고로 인셉션은 살아오면서 본 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덩케르크는 그 옆에 두어도 될 것 같다.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지 벌써부터 기대되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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