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내 모습을 사랑할 준비
3월의 첫 주. 개강. 일곱 번째 개강, 그리고 세 번째 맞이하는 3월 개강. 해리포터 후반부쯤의 호그와트처럼 잿빛인 교정을 거니는 내 옆으로, 1편의 해리포터 삼총사처럼 들떠 있는 새내기들이 지나간다. 신입생, 아마 스무 살 즈음되었을 아이들은 누가 봐도 새내기인 것 같은 옷차림에 행동거지를 하며, 설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졸업하면 뭘 해야 하지 걱정하는 내게서 풍겨져 나올 분위기와는 꽤나 대조되는 것 같다. 스무 살 처음, 출구를 잘못 내려서 길을 헤매고, 정문으로 들어섰지만 이과대까지는 15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봄 햇살을 한껏 받으며 개강날 첫 수업 강의실로 향하던 내 모습도 저것과 비슷했겠지. 물론 지금은 아니다. 수업 시작에 딱 맞춰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게 집을 나서서, 최단 경로로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수업이 끝나면 뭘 먹을지 머릿속에 계산은 이미 끝나 있고, 입으로 되뇌는 "나도 신입생 하고 싶다." 라던지, "졸업하고 싶어.", "자퇴하고 싶다." 따위인, 지금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다는 뉘앙스의 혼잣말까지.
문득 돌아보니, 나는 지금의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나를 꽤 좋아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한참 밴드 동아리를 하던 시절이 그랬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남들에게 사랑받던 시절. 그렇게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시절.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 아니, 계획보다는 꿈이 있었던 시절.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 재미있게 보냈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 가는 게 즐거웠던 시절.
요즈음은, 그 시절과는 크게 다른 것 같다. 일주일 전엔가, "인생에서 제일 재미없는 시기가 요새야."라는 동갑 친구의 푸념을 듣고는 크게 공감했었다. 새내기의 풋풋함은 없고, 막막한 마음을 안은 채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냥 학생처럼 놀 수도 없지만, 돈을 버는 직장인처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은 또 아니다. 학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지만, 고학번이라서 새로운 단체를 들어갈 수도 없고, 먼저 떠나버린 친구들에, 미래 준비를 위해 숨어버린 친구들로 인해 텅 비어버린 인간관계. 공강 시간이면 달려갔던, 친구들로 가득 찬, 따스한 활기가 넘치는 동아리방 대신 같은 처지인 졸업반 친구들과,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 먹는 값싼 학식이나 후문 밥집. 학교라는 4년짜리 사회에서 황혼기를 지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무력함은, 마치 진짜 황혼기도 이러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I've seen the world
난 세상을 알게 됐어요
Done it all
모든 걸 해봤고
Had my cake now
모든 걸 가졌지요
Diamonds, brilliant And Bel Air now
다이아와 찬란함 고급 차 까지도
Hot summer nights, mid July
더운 여름 7월 중순에
When you and I were forever wild
당신과 내가 영원할 것만 같았던
The crazy days, city lights
광란의 날들, 도시의 불빛들
The way you'd play with me like a child
당신과 나는 아이같이 즐기던 때였죠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young and beautiful?
내가 더 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 got nothing but my aching soul?
내가 가진 게 없고 다친 영혼만 가지고 있을 때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건가요?
I know you will, I know you will I know that you will
당신은 그럴 거예요 틀림없어요
Will you still love me when I'm no longer beautiful?
내가 더 이상 젊고 아름답지 않아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
연인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노랫말이, 예전과 다른 일상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는 나에게는, 마치 나 자신을 향한 물음처럼 느껴졌다. 나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찬란했던 순간만을 좋아했던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를 찾아왔다.
교정을 거닐면서, 곳곳에 남아 있는 추억의 조각들을 주울 때가 있다. 꽃샘 추위에도 오들오들 떨면서 여자친구를 꼭 껴안고 있던 호숫가 벤치라던가, 친구와 태풍을 맞아 보자면서 우산도 안 쓰고 걸었던 산책로, 짝사랑하는 여자애와 함께 놀았던 기숙사 광장, 몇 번의 공연을 했었던 원형 극장, 노천 극장, 학관 앞, 풍경 속에 서려진 추억들은 문득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내 머릿속에 재생된다. 정말로 좋았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에 비해 너무나 심심한 요즘이지만, 그런 좋았던 순간들은 내가 가졌던 순간들이니까, 그런 순간들을 지나와서 내가 된 것이니까, 이제 막 시작하는 새내기들은 멋진 순간들을 맞이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것은 내 추억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으로, 학생 시기의 황혼기에 선 나를 조금은 더 좋아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