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우리 집엔 일주일 손님이 산다. 친밀도를 언급하는 일이 이상할 정도로 더없이 가까운 사이지만 정성스럽게 대해야 할 사람이다. 이 손님에겐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특별히 까다로운 건 아니다. 단지 점심 메뉴만은 어제 저녁 혹은 아침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 여기에 그가 원하는 것들을 차려내면 끝이다. 다른 건 다 괜찮다.
이번 주 동안 이 손님을 위해 예약메뉴를 요리 하면 된다. 온라인 수업 듣는 우리 집 큰딸 이야기다. 아이를 손님에 비유한 건 몇 년 전 들었던 강연 때문이다. 가수 이적의 엄마이자 여성학자로 유명한 박혜란 씨가 강사로 나서 한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을 집에 온 손님같이 대하세요. 그러면 잘 지내게 될 거예요. 우리가 집에 온 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감정을 드러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진 않잖아요. 가능한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죠. 그런 마음을 아이들에게 가진다면 문제 될 게 없지 않겠어요.”
어제와 다름없이 11시 반쯤에 아이와 밥을 먹었다.
로제 파스타와 불고기 피자, 샐러드까지 이름하여 이탈리안 한 상이다. 특별히 손 갈 것이 없는 편안한 점심준비가 시작됐다. 파스타는 면을 삶고 시판 소스를 적절히 활용하면 신경 쓸 게 없다. 마늘을 얇게 저며 놓는다. 아침에 사용하다 남은 양파를 썰고 냉동 새우를 조금 꺼냈다. 올리브유를 팬에 두른 다음 마늘을 볶다 양파와 새우를 넣는다. 새우 색이 변해 가며 익어갈 즈음 소스를 적당량 붓는다. 그다음 집에 있는 우유와 면수를 넣고 끓어오를 때까지 잘 저어주고 면을 넣으면 끝이다.
샐러드는 초간단이다. 집에 있는 것 중에서 먹고 싶은 싱싱한 야채들을 올리면 된다. 이들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바로 먹기 전에 올리브유와 발사믹을 뿌린다. 견과류에 애정이 가는 요즘이어서 하루 넛트를 한 봉지 더해주니 고소하고 풍성해진다. 피자는 바로 만들기에 재료와 시간이 필요하기에 간단한 냉동피자로 준비했다. 포장지 앞면에 나와있는 설명대로 에어프라이어에 몇 분만 데워 주면 된다.
아이만 이것으로 차려주고 나는 밥을 먹으려던 마음이 바뀌었다. 접시에 담고 보니 어느새 식욕이 올라온다.음식을 앞에 두고 불현듯 아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있어서 오늘 엄마가 호강하네.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줘서 고마워.”
“엄마 무슨 말이에요. 엄마가 다 만들었는데. 잘 먹을게요.”
모든 세상의 엄마가 그러하겠지만 탄생의 순간부터 제법 제 의견을 말하는 청소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 하며 먹는 순간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어느 유명 레스토랑 음식보다 부족하지 않다며 내가 차린 밥상을 칭찬했다. 즐거운 식사였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특별함이 더해져 있었다. 수요일 점심은 다른 때 같으면 아이가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있을 시간이다. 집에서 단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밥을 먹는 일은 방학을 제외하고는 일 년에 며칠 아니 하루도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햇살이 거실 중앙으로 들어오며 봄기운을 잔뜩 몰고 와 포근해진 날씨도 한몫했다.
서로의 손의 바빠지고 피자와 샐러드를 번갈아 가며 맛나게 먹었다. 냉동식품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고맙다고 여겨질 만큼 만족스러웠다. 우리의 입맛을 적절히 고려한 양념 불고기를 연상시키는 달콤 짭조름한 피자는 샐러드의 신선함과 어우러졌다. 살짝 데쳐 냉장고에 놓아둔 브로콜리는 시원하면서도 짠맛을 중화시키면서 상큼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니 싱글벙글이다. 아이가 해맑게 미소 짓는 얼굴은 덩달아 내 몸을 편안하게 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서로가 정말로 최고의 점심이었다고 칭찬했다. 단지 몇 분의 수고로움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탈리아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대충 그곳 사람들의 식사 또한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소중한 손님이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다녀갔다. 한라봉 하나를 껍질을 벗기고 둘이 반쪽씩 나눠 먹으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어제와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음식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니 하늘과 땅 차이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 실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정서가 있다. 서로가 느끼는 게 다를 수도 있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표정은 물론 전하는 말의 톤과 몸짓에서 다 드러나는 법이니까. 음식에 대한 취향이 서로 비슷하다는 두 사람, 엄마와 아이가 마음을 나눴다.
내가 좋으니 아이도 행복해 보였다. 다음 주는 다시 등교하기에 앞으로 이틀 남았다. 점심에 찾아오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최고의 손님을 위해 오늘도 점심을 준비해야겠다. 평소에는 잔소리하고 예민해지는 어려운 엄마에서, 우리 집을 찾은 고맙고 귀한 이를 위한 요리에는 마음을 다하는 엄마가 된다. 손님, 어렵지만 그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