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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괜찮아! 프랑스 갈레트

# 9

by 오진미


프랑스의 어느 골목이었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요리사가 넓은 철판에 무언가를 부쳐내고 있다. 보이는 모든 것 자체가 설레게 하는 도시의 풍경이 더해져 더욱 궁금해지는 음식이었다. 5년 전쯤이었다. 제주도를 다녀오는 비행기 안, 어느 항공사 기내지에서 만났던 프랑스 골목 풍경이었다. 그 청년이 만들고 있던 건 갈레트였다. 갈레트는 메밀 반죽을 얇고 둥글게 펴서 부친 다음 그 위에 햄과 치즈, 계란, 야채 등 여러 가지를 올려 먹는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음식이다. 이제는 프랑스 현지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해석되어 사랑받는 다고 했다.


토요일 저녁 무슨 이유인지 이 갈레트가 생각났다. 아마 평일과는 다른 일요일을 위한 주부의 마음씀이었을까. 그렇다고 복잡한 것은 싫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기억의 상자가 나를 위해 작동했던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에 먹기로 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몇 년 전에 한 번 만들고 두 번째다.


제주도의 바람과 햇빛, 비가 키워낸 메밀을 꺼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고향에서 오랫동안 음식의 중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가끔 메밀 김치전을 해 먹거나 수프처럼 끓여 마시는 까닭에 엄마가 보내준 게 냉동실에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량을 꺼내어 차가운 물에 풀었다. 주르륵 흐를 정도로 묽게 반죽했다. 평소에 워낙 짜고 단것들을 먹는다는 생각에 다른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기로 했다. 순수한 메밀 자체다. 작은 양푼에 담긴 흰색 메밀을 한국자 떴을 때 흐르는 가벼움이 재밌다. 사람들이 검은색을 떠올리지만 순수한 메밀은 투박한 빛바랜 하양이라고 하면 무리가 없다.


메밀 위에 올릴 것들을 생각했다. 집에 있는 토마토와 양파를 썰어 올리브유에 소금만 뿌려 살짝 볶았다. 나머지는 노랑, 빨강 파프리카를 채 썰고 딸기 몇 조각을 썰어놓으니 준비는 끝났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 먹는지 검색해 보니 색도 모양도 예쁜 여러 가지가 나왔다. 그렇지만 난 언제나 내 맘대로다. 부엌의 주인이 손길 가는 대로 꾸몄다. 남편에게는 흡사 계란말이로 만들었다. 원래 갈레트 스타일은 둥근 끝부분을 살짝 접어 주어 정방향으로 만드는 게 정석이지만 잠시 궤도를 이탈해 보았다. 양파와 토마토 계란을 올려 돌돌 말아먹기 편하도록 했다. 아이들에게는 딸기잼과 모차렐라 치즈를 가장자리에 넣은 다음 가운데에 딸기와 파프리카를 올렸다.


부족한 듯 어설퍼 보이는 갈레트가 접시 위에 놓였다. 소금 간을 하지 않았기에 심심한 듯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전체적으로 다른 재료의 맛이 살아나게 하는 은은한 담백함과 끝 맛의 깔끔함이 압권이다. 야채와 함께 어우러지니 메밀의 향이 입안에서 맴돈다. 빵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단순하지만 깊은 맛이다.


아이들이 접시에 놓인 게 뭐냐고 묻는다.

“응. 갈레트라고 하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먹는 요리야. 크레이프처럼 여러 가지 달콤한 것도 요즘에는 올려놓고 길거리에서도 쉽게 사 먹기도 하고”

막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를 물어오자 처음 만났던 그때를 더듬어가면서 얘기했더니 재미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프랑스 음식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귀가 솔깃하다. 베이컨을 넣기도 한다는 말에 다음에는 꼭 그것을 준비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엄마, 이거 정말 깔끔해서 좋다. 다음에도 해 먹어요.”

큰아이는 몇 번 경험하지 않았던 메밀 맛이 꽤 괜찮았나 보다. 식탁에 오른 건 각각의 접시에 올려진 갈레트와 샐러드뿐이다. 하얀 밀가루에서 벗어나는 일을 고민하는 요즘이었기에 단출하지만 신선했다.


어릴 적 메밀이 들어간 음식은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메밀은 기름기 많은 음식의 부담을 덜어주거나 마을의 경조사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돼지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국에 메밀가루를 풀어 느끼함을 달랬고, 메밀전을 넓게 부친 다음 채 썰어 살짝 데친 무에 참기름과 소금, 깨소금을 넣고 만든 무나물을 소로 넣어 돌돌 만 빙떡을 만들어 손님상에 올렸다.


이 갈레트가 그 빙떡과 닮은 듯하면서 다르다. 메밀 위에 여러 가지를 올려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최소한의 재료만을 고집한 빙떡에 비해 이건 여러 가지 원하는 걸 올릴 수 있으니 자유롭고 풍성하다. 자칫하다가 절제력을 잃게 된다면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음식으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침에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어색하다. 빨리 만들어야 하고, 먹기에 무난해야 하기에 가능한 예상 가능한 범위의 것들을 식탁에 올리려고 한다. 메밀이라는 재료만 다를 뿐 다른 것들은 익숙한 것들이어서 특별한 듯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와 남편의 반응이 살짝궁 신경이 쓰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을 먹으며 프랑스 어느 거리에서 갈레트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내 취향보다는 그들의 삶이 묻어나는 그들만의 갈레트는 어떤 모습일는지 궁금해졌다. 어느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프랑스에 갔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게 박물관인데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한 번 가본 그곳은 유명하다는 곳들만 잠시 들렀기에 거리와 도시를 살피지 못했다. 그곳 어디에서 갈레트를 먹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프랑스의 전통 음식 갈레트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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