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편식쟁이가 되기로 했다

by 오진미


종이신문을 참으로 오랜만에 찬찬히 읽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몇 장 남은 책을 볼까 하다 책장처럼 쌓여 있는 우리 집 신문 보관장으로 갔다. 가장 최근의 것 두 개를 꺼냈다. 1면부터 마지막까지 무슨 내용이 있는지 우선 살핀다. 그런 다음 눈길이 가는 기사와 칼럼, 인터뷰를 읽어 나갔다.


무슨 이유인지 집중이 잘 된다. 평소 같으면 조금 읽다가 딴짓하기 일쑤인 나인데 오늘은 그런 게 없다. 진분홍 형광펜으로 줄까지 긋는다. 한 면을 꽉 채운 인터뷰 기사에 집중하고 있으니 마치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 그 공간에 있는 느낌이다.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었기에 답변은 물론 질문도 꼼꼼히 들여다보게 된다. 추상적이거나 맥락에 어그러지지 않는 꼼꼼한 물음이다. 그래서인지 나오는 답 또한 매우 치밀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느 학자의 칼럼인데 전체적으로 어렵다. 지속적으로 나열대는 데이터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정리 안 되는 체제 용어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외국 여러 나라의 사례는 내게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 나가다 보니 희미하지만 내용이 들어온다. 안개 낀 도로를 조심조심 운전하는 기분이랄까?


다른 이의 글은 명확했다. 일본 현지에서 살아가는 한 교수가 바라보는 일본의 모습을 담았다. 다루려는 내용에 대한 정의부터 사례들을 나열하는데 쏙쏙 들어왔다. 마치 나를 위해 써 놓은 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감성에 호소하는 글이 아니기에 절제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표현은 내용이 선명하게 이해되도록 했다.

남편은 매일 집에 신문을 갖고 들어 온다. 한두 개가 아닌 중앙지와 지방지까지 합치면 대여섯 개가 될 정도다. 난 신문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신문 특유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할 때는 어디선가 불편한 감정이 살아날 정도다. 꼭 봐야 할 것 몇 가지만 챙겨 오라는 말을 꺼낸 지 10년이 다 돼 간다. 그는 귀를 닫은 지 오래다.


이런 그간의 감정이 쌓여서인지 신문과 거리를 두었다. 매일 새벽부터 신문 보는 일이 밥벌이였던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러다 가끔 문화면을 들춰내 무슨 전시를 하는지 읽고 싶은 것만 쏙 빼서 읽었다. 4단이나 5단 정도로 편집된 내용이었으니 그리 힘들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신문이 내게로 말을 걸었다. 하나의 면을 차지한 기획기사들은 아주 작은 책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 마치 독립출판사에서 펴낸 설레게 하는 신간을 받아본 기분이다. 인터뷰를 즐기던 과거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아는 만큼 물을 수 있고, 잘 들어야 매끄럽고 무리 없는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다. 한 시간을 넘겨 누군가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피곤이 밀려온다. 눈은 충혈되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간다.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아 그걸 물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 전에 집중에 집중을 해야 할 일이었다. 인터뷰에 나섰던 기자의 모습을 잠깐 그려 보았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신문을 보고 각 언론사들은 인터넷판을 새롭게 만들어 갈 무렵이었다. 이제 종이신문이 사라질 거라고 난리였다. 지금도 그 얘기는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신문을 넘기며 읽는 사람보다 포털을 통해 접근하는 비율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매일 새벽 혹은 오후가 되면 윤전기 잉크 냄새가 살짝 스치는 따끈한 신문을 받아 들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기분은 특별하다. 생생한 사회의 이슈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읽고 싶은 것만 골라 봤으니 제대로 된 신문보기라고도 할 수 없다. 신문의 하이라이트인 1면을 외면했고 사회, 경제 등 누구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마음이 갈 때만 뒤적일 뿐이다. 30면 넘는 그 많은 것들을 훑고 지나기에는 준비가 덜 됐다. 아이에게 골고루 먹지 않는다고 매일 잔소리하지만 정작 난 신문 편식쟁이였다.


취사선택하기로 했다. 남들이 뭐라 한들 어떠랴. 우리 집에서 오직 남편만 독식했던 쌓여가는 활자 더미에서 한 명의 독자가 늘었으니 신문 입장에선 대환영이지 않을까 싶다. 남편에게 아침 식사를 끝내고 물었다.

“당신은 신문을 어떻게 읽어요?”

“응. 정독해.”

내 예상대로였다. 양팔 벌려 신문을 들고 안경까지 벗어가며 얼굴을 파묻는 그였다. 그게 좋다니 어쩔 수 없지만 난 절대 그렇게는 읽지 못한다.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끈기도 없다. 그렇다고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애쓰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건 이제부터 난 신문을 읽을 거라는 것. 기자의 호흡을 들여다볼 만큼의 관심을 기울일 순 없더라도 수많은 이야기 중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해선 눈을 크게 떠 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더 넓고 깊게 보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어제저녁 들고 온 신문 뭉치가 거실 한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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