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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사진을 읽습니다

# 13

by 오진미


먹는 일과 만드는 일 두 가지를 다 좋아하는 나를 돌아본다. 그때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20~30년은 족히 넘겼을 삐걱 소리 나는 마룻바닥의 교실이었다. 책장들이 누가 더 큰지 키 내기하듯 서 있고 그사이에 한 아이가 하얀 커버로 된 요리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여고 1학년인 그는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났는지 책에 빠졌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의 나였다.


나는 학교 도서관을 관리하는 도서부 회원으로 아침 자율학습과 오후 청소시간에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청소는 물론 책 대출과 반납, 정리가 중심이 된 일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었고 그리 다녀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면 서고 가운데 그늘이 드리운 좁은 공간에 털썩 앉아 책을 봤다. 소설책보다는 다양한 색으로 가득 채워진 요리책이 내 단골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쉽게 요리 정보를 알 수 있는 채널이 많지 않았다. 셰프라는 단어의 존재 조차 모르던 시절, 요리연구가들이 종종 레시피북을 내었다. 내가 봤던 책들도 그런 종류 중 하나였다. 한식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는 서양의 음식이 십여 권의 넘는 책 안에 빼곡하게 담겼다.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압권인 건 사진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일반적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스타일에 신경 쓴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컬러 사진들은 내 눈을 호강시켰다.


한식은 그렇다 해도 서양의 음식들, 파스타와 샐러드 등 접해보지 못했던 것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다. 공부도 마음과 달랐다. 홀로 자취 생활을 하던 시기였기에 그 책들을 보는 시간은 내게 위로가 되었다. 보고 또 보고 해도 질리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은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할 정도였다.

“넌 왜 도서관에 오면 요리책만 보니? 그렇게 재밌어. 난 관심 하나도 없는데.”

“예쁘잖아. 그거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때 그 사진들은 내게 감동을 주는 어느 예술가의 작품이었다. 몇 달이 지나니 페이지 수가 절로 머리에 들어올 정도였다.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요리가 놓여 있는 공간과 삶을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어른이 되면 이런 것들을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봐야지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때를 희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나는 이제 어른이 됐고 매일 음식을 만든다. ‘내가 우리 집 ~요리사’라는 오래전 광고 카피가 지금 내게 어울리는 이름인 듯하다. 아침과 저녁은 언제나 식구들을 위해 내 손이 부지런해진다. 날씨와 계절, 기분에 따라 메뉴를 고민하거나 대부분은 집밥이라 부르는 익숙한 반찬들을 올린다. 그 시절 사진 속 음식은 가끔 선물처럼 올린다. 특별한 날, 그보다는 내 에너지가 충만한 시점에야 가능하다.


꽃향기에 이끌리듯 다양한 음식 사진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 추억은 식탁 위에 올리는 먹거리에 대해 대범하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주었다. 유명 소설가를 만든 대문호의 작품처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요리 전집이 내겐 그러했다.


오랜만에 요리잡지를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했다. 받아보니 사진과 음식을 만든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렸다. 서정적이게 느껴지는 부엌 풍경들이 얼핏 얼핏 스치고 잘 정리된 그곳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 완성된 한 그릇이 클로즈업됐다. 옆에는 관련 레시피가 친절하게 적혀있다. 난 여전히 사진에 멈추게 된다.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과 요리를 보며 맛을 그리기보다는 사진이 전달해 주는 요리를 읽는다. 전해오는 느낌이 어떤지 색과 분위기를 느껴 보는 게 우선이다. 단풍나무 잎의 얼개를 연상시키는 잡곡빵은 가을의 어느 오후 같다.


엄밀히 말하며 요리법을 아는 일은 관심이 없다. 이미지들을 감상할 뿐이다. 소설책을 마주하듯 토마토와 파프리카, 루콜라, 두부, 양파 당근 등 재료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김밥과 카레와 샐러드를 살핀다. 아마 그 속에서 요리의 즐거움과 설렘을 차곡차곡 마음 한편에 쌓아두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내일 아침을 준비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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