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생일날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생일이면 친구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받고 싶었다. 소위 어른이 됐다고 여길 때쯤에는 친구를 만나는 날이었다. 결혼하고 엄마가 되어 주부로 살아가는 요즘은 매해 한 번씩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커다란 꽃바구니 선물을 바랐지만 그건 순전한 내 마음이었다. 육아에 허덕이다 세월이 흘러 초중등 학부모가 된 지금은 애들과 케이크 촛불을 부는 날이다.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해진다. 이리된 건 40을 넘기고 어느 날부터였던 것 같다. 남편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간단한 인사가 전부일 때도 있지만 섭섭하지도 않다. 생일을 보통의 하루로 보내도 될 만큼 헛헛함이 없는 일상인 걸까? 그보다는 내 마음처럼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일종의 단념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생일을 했다.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서 생일상을 차리거나 꽃이 그리우면 직접 가서 샀다. 내가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시간이 되었다. 누군가 차려주는 것이 아니어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사람의 관심과 애정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 3월의 끝을 달려가는 내 생일날 그동안 감춰두었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 때 느껴지는 감정은 또 다름이었다. 관심을 두고 진정으로 대해주는 이가 있을 때 난 충만한 고마움과 행복을 느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온기라 특별했다.
주말을 제외하면 매일 만난다. 아이의 친구 엄마이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다. 알고 지낸 지는 8년, 조금 가까워졌다 느낀 지는 몇 해 전부터다. 동네 공원에서 운동하는 시간이 비슷했기에 어느새 짝꿍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집 앞에서 만났다.
“생일 축하해요.”
카카오톡 알림을 보고 알았다며 인사를 건넨다.
공원을 서너 바퀴 돌았을 즈음 갑자기 커피가 생각났다. 아침부터 동생에게 받은 별 다방 쿠폰이 있었기에 함께 가자고 얘기했다.
“우리 오늘 밥 같이 먹어요. 그러잖아도 점심을 사려고 했어요. 코로나로 밖에서 먹기 그러잖아요. 제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서 11시 반 정도에 갈게요.”
얘기를 듣는 순간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 커피 마셔요. 케이크랑 내가 쿠폰도 있고 밥은 다음에 가요.”
결국은 밥으로 정했다. 그동안 그가 먼저 밥을 먹자고 하는 일이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트를 다녀오고 집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조금 있으면 손님이 온다는 생각에 몸은 더 바빠진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그였다.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조각 케이크 상자가 들렸다. 부지런히 이것을 사기 위해 움직인 탓에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미소에는 낯선 내가 함박웃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바삐 움직인 탓에 차가운 음료에 끌렸다. 나를 위해 고민했을 시간과 정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음식이 도착했다. 초밥이다. 나를 위한 점심이 식탁에 차려졌다. 생일이라고는 하지만 미역국도 생략한 아침이었다. 국의 재료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귀찮았다. 내 생일이니 내 맘대로다. 남편과 아이들의 축하 인사를 받긴 했지만 매해 돌아오는 하루 정도로 여겼다. 연어 초밥 한 조각을 고추냉이 간장을 살짝 찍어서 입에 넣는데 뭉클해졌다. 조금만 더하면 눈물까지 핑 돌 태세다.
누구나 어느 정도 친하면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지금 내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달랐다. 누구에게 쉽게 무얼 하자고 얘기하지 않는 그의 지극한 성정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는 보통의 아줌마들과는 달랐다. 멋을 부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언제나 무던하게 아이들의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살아가는 일에 집중한다. 사람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일에도, 어디를 놀러 가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일도 없다. 그래서 때로는 어떻게 저렇게 살까 하는 선입견이 생길 정도였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기만의 신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흥적으로 동네 카페로 달려가자는 내 제안에 정중히 거절하는 모습이 때로는 불편했다. 다분히 감정적인 나와 달리 계획적이고 이성적인 그였다. 그러다 마음을 써야 할 때는 확실히 전하는 속 깊은 사람이다. 우리의 수다는 이어졌다. 맛있는 밥을 앞에 두니 여러 가지 얘기들이 즐겁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그와도 보이지 않는 그것, 마음들에 관한 얘기를 막힘없이 나누게 되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치즈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내 모든 일은 나보다는 다른 이를 향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누군가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해 준 한때를 보내는 순간은 꼭꼭 숨어있던 무거운 짐들을 자동으로 내려놓게 했다.
“언니 그동안 잘살았네.”
점심시간에 생일이라고 전화를 해 온 동생이 하는 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선물이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인정의 욕구를 지니고 산다. 누군가는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거나 가슴에 묵혀놓은 채 제 일이 아닌 것처럼 잊고 살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오랫동안 콩콩 뛰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충분히 나를 감싸준 위로와 축하의 시간이었다. 시들었던 꽃이 시원한 물을 먹고 피어나는 느낌이다. 그는 아이가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자 서둘러 돌아갔다. 나를 보면서 그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