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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좋아! 실패한 쪽파 샌드위치

# 11

by 오진미


쪽파에 빠졌다. 매일 밥상에 이것을 올릴 정도다. 긴 줄기잎은 초록이고 땅에 몸담고 있던 뿌리로 갈수록 하얀색은 절정에 달한다. 예전에는 김치,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강회, 양념의 화룡점정으로 색깔과 향을 내는 재료로만 이용했다. 그냥 파일뿐이었다.


봄부터 이 녀석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옆집 언니가 알려준 대로 쪽파를 송송 썰어서 간장과 매실액, 참기름, 깨소금을 넣은 파장을 만들어 밥을 비벼 먹으면 서다. 파는 가능한 그릇을 가득 채울 정도로 넣고 간장은 조금 사용하는 게 포인트다. 따뜻한 밥에 이것을 올려 먹으면 밥도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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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의 맛을 섬세하게 경험하고부터는 달리 보였다. 알싸한 마늘 맛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여린 잎이 주는 부드러움과 줄기 부분으로 갈수록 탱글탱글 한 싱싱함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완도에서 농사짓는 이웃이 전한 이것은 마트에서 샀던 것과는 빛깔부터 다르다. 언제 그리 자랐는지 늘씬하면서도 단단하다. 뿌리에 묻은 흙냄새까지 함께 하니 섬의 봄 향기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나를 위한 점심이다. 혼자만의 메뉴를 고민하다 빵과 파의 조합을 생각하게 됐다. 머릿속으로 쪽파가 잔뜩 올려진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할 것 같았다. 여기에 다른 소스를 더하지 않으니 부담 없을 거라며 혼자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올리브유에 생파를 버무릴까 하다가 파의 향이 강할 것 같아 진로를 바꿨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파를 살짝 구운 다음 달걀 물을 올려 오믈렛 스타일로 만들기로 했다. 모양은 그런대로 성공이다. 그런데 파를 기름에 구운 이상 날것이었을 때 전해지는 활력은 사라지고 숨이 죽은 모습은 어딘지 어색하고 맘에 안 들었다.


호밀빵을 두 조각 굽고 상추를 올린 다음 파를 올리고 방울토마토 몇 개를 얹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기대했던 만큼의 맛이 나와야 할 텐데 살짝 떨렸다. 내 예상이 빗나갔다. 그리던 맛은 저만치 도망가버린 듯했다. 달걀을 만난 파는 질겨졌고 사랑했던 싱그러움은 자취를 감췄다. 흡사 파전 위에 빵이었다.


혼자 먹기에 누구의 평가에 민감할 필요도 없었지만 실망스러웠다. 신선함을 줄 거라는 희망이 사라졌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분 좋게 먹기는 뭔가 어색했다.


주인의식 비슷한 게 작동했는지 접시를 비웠다. 배 속은 이미 꽉 차 있음에도 뭔가 새로운 걸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싹튼다. 아침에 삶은 달걀과 다시 한라봉 하나를 먹었다. 허기질 이유도 없는데 정신없이 먹었다. 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요리는 자신 있다는 충만했던 믿음에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게 일이 되어버렸다. 다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한 게 불편하다. 이제는 후회의 시간이다. 샌드위치로 끝냈어야 할 점심이었다. 저녁까지 이 기분은 이어졌고 가족들은 모르는 혼자만의 부자유였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사는 아니지만 보통 이상은 가능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게 내 부엌에서만은 허락되는 일이라 여겼다. 때로는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순간이 영화 속 상상처럼 즐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 짧은 동안 쪽파 샌드위치를 떠올리던 시간이 좋았다. 작은 기대는 잠깐의 행복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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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는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만큼이나 감정 또한 변화무쌍하다. 가족에게도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하루에도 수십 개 이상의 마음이 요동친다. 그중에서 만족스러운 음식을 접시에 담는 일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오랜만에 실망스러운 점심이었다. 모든 게 그러하지만 해 봐야 알 수 있음을, 다신 이 음식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쪽파는 그냥 파전과 김치가 제일인 듯싶다. 그럼에도 봄날의 쪽파는 푸르러서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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