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나를 세우는 시간
나는 걷는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나면 청소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간다. 벌써 4년이 지났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마음을 다잡는다. 엄마, 부인, 대신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때로는 집착하리 만큼 걷기에 몰두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회오리바람처럼 갑자기 생기는 고민과 불안에 숨쉬기조차 어려울 것 같았다. 전업주부로 지낸 지 10년이 지났다.
초등학생 시절 에펠탑 앞에서 뉴스를 전하는 앵커가 멋있어 보여 기자가 되기로 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못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잡지와 책을 읽고 메모하며 꿈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에는 ‘부지런한 열정 가득한 기자’를 마음에 두고 지방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일했다. 30대 초반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모두가 거쳐 가는 삶의 시간표대로 잘 움직이고 있다고 여겼다. 육아와 일이 힘에 부쳤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며 워킹맘 생활을 이어갔다. 균형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다 보니 위기가 닥쳤다. 엄마로 지낸 지 3년을 조금 지날 무렵 몸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건강하지 않으면 아이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일을 그만두었다. ‘주부’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집에 집중하는 하루는 되돌이표 하는 과정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애들을 챙겼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된 법칙은 없었지만 이미 나만의 활동표를 만들어 놓고 살고 있었다. 일할 때 몰랐던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큰 과제는 집 정리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누다 알게 된 동네 아주머니댁에 차를 마시러 간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말끔히 정리된 집안 풍경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 자체였다. 우리 집과 비교되면서 내가 자꾸 작아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루, 이틀, 사흘 전력 질주했다. 집안 정리에 집중할수록 몸은 지치고 마음도 답답해졌다. 위층 언니는 아이들이 클 때는 다 그런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돌이켜 보니 깨끗한 집에 대한 욕구보다도 현재의 나를 못 마땅해하는 마음에서 오는 행동이었다. 두 딸에게는 항상 잔소리하고 화를 내는 일이 일상이었다. 남편에게도 규칙적으로 운동하기 등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해주기를 바랐다. 불편함이 커질수록 먹는 것으로 풀었다. 입에 달콤하고 자극적인 것을 넣는 순간 현실의 고민이 사라지는 망각을 즐겼나 보다. 어느 날 거울 속에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얼굴은 부풀어 올랐고 몸은 무거워 보였다. 활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우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평소에 얘기를 잘 들어주는 동생에게 날마다 전화해서 답을 구하며 넋두리했다. 나를 꿰뚫어 보지 않고는 건너기 힘든 강이었지만 바라보기를 거부했다.
“언니 견디어야 해, 화가 나고 울고 싶은 순간 멈추고 언니를 바라봐. 왜 그러는지 언니가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안의 화가 나를 갉아 먹고 있었다.
삶을 붙잡고 싶었다. 이제 나를 돌봐야 할 시간이었다. 내가 잘하는 운동, 걷기부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는 일도 자신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애들이 학교 가는 평일에는 8시 반, 방학이나 주말에는 아침 먹기 전에 공원으로 나갔다. 20대 중반, 한강공원에서 걷기와 달리기로 달라진 나를 발견했던 그때를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양팔을 눈높이까지 올리며 매일 40분 이상을 걸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도는 일이라 때로는 지겨웠지만 다섯 바퀴 도는 일을 철칙처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혼내고 습관처럼 했던 마음속 반성문 쓰기를 멈추기로 했다. 먼 거리를 운전하며 출퇴근하는 남편 걱정에 빠져드는 일도 그만하기로 했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는 순간에만 집중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걷기는 정신의 활동이라고 했다. 이 말에 200퍼센트 공감한다. 폭우가 아니면 애인 만나러 가듯 공원으로 달려갔다.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보냈다.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만큼 여러 가지 일에도 관대해지는 여유가 생겼다.
‘오성실’이라 불릴 만큼 꾸준함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묵묵히 소리 없이 걸었다. 주부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갈등과 방황의 끝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답은 단순하다.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너는 성실하잖아. 그건 큰 장점이야. 그것 하나로 잘 살 수 있을 거야.”
어느날 오빠에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자 이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출산 전날까지 지각 한번 없이 회사에 출근했었다. 30년 전 고등학교 체육 시간, 뜀틀 시험에서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때 선생님이 했던 말은 아직도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 된다.
“진미가 뜀틀을 넘지는 못했지만 저렇게 열심히 하는 학생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A를 주고 싶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동의한다는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반 친구들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결국 A를 받았고 열심히 하는 아이로 각인되었다.
항상 힘이 들어갔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부지런히 꾸준히 하다 보면 길이 있다고 나를 위로했던 시절이었다. 무거운 바윗돌을 얹어 놓고 지냈다.
“자신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지 말아요. 긴장하고 열심히 한다는 건 성장을 위한 좋은 기반이 되는 거에요.”
힘이 들 때 내 얘기를 들어주던 선생님의 한 마디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생각을 조금만 비틀었더니 내가 달라 보였다. 아이를 키우며,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경험하며 모든 일은 될 만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가족들에게 아침밥을 챙기고 집안을 살피는 하루가 소중하다. 감정을 감추기보다 솔직해지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편해졌다. 천천히 가면 되고, 못해도 괜찮아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심심서당(深心書堂)’을 열었다.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며 마음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막내 친구 서넛과 함께 매주 금요일마다 집에서 모인다. 올해로 2년째다. 엄마 아빠에게 속상했던 일을 그들의 언어로 풀어놓거나 책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생각이 신기할 정도다. 잊고 있던 미소가 살아났다. ’美 테이블‘이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마음 통하는 친구와 단둘이 매달 한 번 만난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친구에게 레시피를 알려준다.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날 정도다. 요즘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듯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에 도전 중이다. 가끔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물음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하고 있어 움직이고 있다’고 짧게 답한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내 속도로 살아보기로 했다. 분명해진 건 없다. 그냥 걸어갈 뿐이다.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성실’을 고마워하며 언제나 변치 않는 친구로 지내야겠다.
“진미야 고생했어. 지금처럼 살아가면 될 거야. 넌 하고 있잖아.”
나를 위한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