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 위해 미소를 짓습니다

우리집 초록 정원 이야기

by 오진미

오랜만이다. 첫 만남의 설렘이 사라진 지 오래다. 줄기 하나로 시작해서 두세 개로 늘었던 화분은 이제 달랑 하나만 남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장미허브. 텃밭에 막 자라기 시작하는 상추의 부드러움을 닮은듯하면서도 단단함을 뽐내는 그에게 ‘그린골드’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집으로 온 지 올해로 7년이 지났다. 매일 곁을 지나치다 오랜만에 향기에 이끌려 잠시 멈추고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린골드와의 인연은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남편 직장이 있는 광주에서 살기로 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지내는 일도 힘든 상황에서 무더운 여름은 불편함과 혼란스러움을 더했다. 마음 둘 무엇을 찾았다.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날 비를 피해 유모차를 정신없이 밀며 뛰어가다 휴대폰을 길에 떨어뜨렸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가 길에서 줍고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스 한 병을 들고 감사 인사를 갔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할머니는 동네 터줏대감으로 모르는 게 없었다. 주변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성당에 대해서도 묻게 되었다. 다음날 약속을 잡고 아이와 성당도 구경할 겸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집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성당은 아담한 조립식 건물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편하게 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같은 방향의 신자 한 분을 소개하며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분 같은데….”

“네 이사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어린가 봐요. 카시트가 있고.”

유난히 큰 눈을 가졌던 언니는 아이가 조금 아프다고 했다. 아이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에 건넨 말이었는데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이었다. 집에 와서도 왠지 마음이 쓰였다. 그 후로 몇 달간 잊고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고를 다녔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면 의식처럼 학년 미사가 있다. 성당을 갈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해짐을 느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만큼 신비로운 시간이었다. 이때부터 카톨릭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바쁜 일상에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전업주부로 변신한 그즈음에 성당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터라 태교와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8개월 동안 매주 미사를 드리고 교리 공부도 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출산을 2주 앞둔 크리스마스날 무거운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 양배추 인형처럼 귀여운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기가 돌이 지나고 육아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을 만큼 정신없이 지내던 때다. 어느날 놀러 오라는 언니의 연락을 받았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기에게 겹겹이 옷을 입히고 언니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이 들어왔다. 베란다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초록 식물에 마음을 빼앗겼다. 장미허브였다. 여름 신록을 연상시키는 빛깔은 단연 돋보였다. 언니와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허브 가지 하나를 얻었다.


이날 언니 아이가 혼자서는 거동이 어려울 만큼 몸이 많이 안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어날 때 뭐가 잘못됐는지 뇌가 다쳤다고 했다. 언니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지 몰랐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가득 담고 살아가는 모습을 봐 왔기에 당황스러웠다. 누구나 언니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질 만큼 긍정 에너지를 얻게 된다. 차를 운전해 동네 어르신들을 성당으로 모셨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일처럼 나섰다.

“언니 매일 어떻게 그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어요. 언니도 힘들잖아요.”

“웃지 않는다고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잖아. 받아들여야지. 걱정 근심에 가득한 얼굴은 별 도움이 안 되더라고. 우울이 깊어질 뿐이지. 미소가 나를 기운 나게 하는 것 같아.”

언니는 매일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가 하루를 보내는 힘이 된다고 했다. 언니는 일상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거울이었다. 언니도 시간의 무게를 오롯이 견뎌 왔기에 지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신을 원망하기도 했고, 자신 앞에 놓인 큰 산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엄마로서 하루를 살아갔다고 했다.

언니 집에서 가져와 줄기 하나로 새 삶을 시작한 장미허브는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작은 허브가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언니의 지난날을 기억하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징표 같다. 아주 작은 화분에 심었다. 흙이 적당히 마르면 물을 주고 세심히 살폈더니 무럭무럭 자란다. 베란다 정원이 향기로 가득하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분갈이로 가족이 늘었다. 바라만 봐도 좋았던 내 마음은 2년 정도 지나니 시들해졌다. ‘처음처럼’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가지가 꺾이거나 시름시름 생기를 잃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화분을 정리하고 제일 상태가 좋은 것만 살려두었다. 무심히 흘려보냈다. 관심이 줄어드는 만큼 그린골드도 그냥 살아가는 듯했다. 그러면서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나 보다. 수많은 아침과 밤을 보내며 줄기는 나뭇가지처럼 단단해졌다.


그린골드를 바라보다 언니가 생각났다. 한결같음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절감하는 시간이다. 언제나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주는 언니다. 추운 겨울 동트기 전 새벽 미사 가는 길에 동행했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간절한 바람을 담은 언니의 기도가 성당 고요한 공기를 휘감아 돈다.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냄비 가득 소고기미역국을 끓여다 주었다.

“아기도 목욕시켜주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네.”

언니의 진심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살펴보던 장미허브에서 언니의 사랑 향기가 잔잔히 퍼진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살아가는 그린골드에게 박수를 보낸다. 신비의 물약처럼 마음을 붙잡아주는 향기를 내어주는 그린골드가 고맙다. 빨래를 널다 부러진 가지를 발견하고 다시 살려 보기로 하고 토분에 심었다. 오늘을 보내고 내일이 오면 지금보다 튼튼해지기를 바란다. 언니가 보냈던 하루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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