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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27. 2021

마음을 돌돌 말아 양배추 롤

# 25

  

마음이 어렵다. 잘 쓰면 정말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한 만 못하다. 언제나 음식은 이것과 연결되었다. 내 의식의 강요이거나 어린 시절 정성이 최고라는 엄마의 말이 부지불식간에 몸에 배어버린 탓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부엌에서 기꺼이 애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의무감으로 몰아세우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는 날이 있다. 누구를 위해라는 아무도 모를 명제를 가슴에 담고 휴식을 위한 밥을 만들기로 했다.     

일요일이었다. 김치냉장고에서 엄마가 보내 준 양배추가 눈에 들어왔다. 새천년 초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인어아가씨>에서 이 음식을 처음 만났다. 어느 날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남자 배우가 연인에게 전할 요리를 위해 책을 보고 열심인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저리도 힘들까 생각하며 언젠가 도전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배추 롤이었다. 살짝 쪄낸 양배추를 펼치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어 돌돌 말아주면 된다. 아주 가끔 식탁에 올렸었는데 일 년만인 것 같다. 손이 많이 가기도 하지만 이것 하나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갈아놓은 돼지고기와 양배추만 있으면 나머지는 집에 있는 것들을 활용하면 된다. 마늘과 양파, 당근, 두부, 쪽파까지 냉장고 야채 상자에 있는 기본 재료들을 다 불러내어 잘게 다졌다. 간은 간장과 소금으로 하고 만두소를 만들 때처럼 잘 주무른다. 쪄낸 양배추를 도마에 올리고 소를 아주 작은 럭비공처럼 만든 다음 양배추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꼼꼼히 말아준다.      


팬에 모든 재료를 펼쳐 놓는 볶음요리가 자유 경기라면 롤은 어려워 보이지만 제한된 구역에서 중간 탈락자가 없도록 꼭 싸매는 규칙만 잘 지킨다면 무리가 없다. 하나둘 완성작이 나오기 시작한다. 딱 열 개를 만들었다.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기에 저녁 여섯 시를 넘길 무렵부터 끓이기 시작했다. 팬에 담긴 소스가 보글거릴 무렵 롤을 올려야 하는데 깜박했다. 우리 집 주방이기에 괜찮다. 토마토 두 개와 다진 마늘을 적당량 놓은 다음 시판 스파게티 소스 몇 숟가락과 물을 고루 섞은 다음 부어주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알아서 할 일이다. 몇 분을 기다리니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막내가 냄새를 맡고는 벌써 내 곁에 와 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맛보게 했더니 얼른 먹고 싶다고 난리다. 20여 분을 끓이니 점점 진한 토마토 향이 흐른다. 양배추와 고기 사이에 걸쭉해진 토마토 국물이 최고의 맛을 내는 절정의 시간이다.     


일요일 오후는 부담스럽고 싫다. 다음날 쉬던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회사에 가야 하는 까닭이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나고 시계를 멈춰 버리고 싶을 정도다. 벌써 십여 년이 흘러버린 워킹맘 시절 내 모습이다. 티비 앞에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꼼짝 않고 있는 남편을 보니 정신없이 회사와 집을 오가던 시절이 그려진다. 그때의 감정들이 살아났다.     


남편의 리모컨 돌리기는 무엇이 불안한 듯 쉼 없이 이어져 야구와 축구, 농구까지 스포츠 프로그램을 오간다. 오후부터 흐리겠다는 일기예보도 적중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휴일에 대한 미련과 내일에 대한 무게가 짙은 안개를 드리운 풍경이다.      

맛있는 음식이 위로해줄 거라 믿었다. 내 마음이 양배추 롤로 뻗어 나갔다. 각자의 그릇에 롤을 두 개씩 넣고 소스를 적당히 담았다. 흰 그릇에 반사되어 나오는 국물 색이 따뜻하다. 

나이프를 들어 롤을 잘랐다. 안에 있는 것들이 양배추 품에서 얼굴을 내민다. 

“엄마 이거 오랜만이다. 고급스럽다. 소스도 맛있고.”

큰아이의 한마디가 모든 걸 말해주었다. 드러내지 않은 내 생각이 식구들에게 전달된 느낌이다. 양배추를 반기지 않는 아이들도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남편도 마음에 드는지 “잘 먹었소.” 한 마디를 경쾌하게 날리고 사라진다.     


양배추를 돌돌 말아가면서 어느 때 보다 내 손이 정성스럽게 움직였다. 부엌에서 음식을 하다 보면 빨리 끝내야지 하는 조급함이 밀려와 여유를 잊기 마련인데 오늘은 이상했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서 하나를 완성했고 또 이어졌다. 꺼내놓지 않은 가슴속 얘기, 남편과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꼭꼭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말은 그저 공중에서 사라지는 연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잘 될 거야”, “괜찮아”라는 한마디가 절절히 그리울 때도 있지만 끝까지 들어주고 시간을 함께할 때 큰 위안을 얻는다. 롤을 만들며 보일 수 없는 깊은 진심을 한 그릇에 담고 싶었다. 월요일 아침에도 남은 세 개의 양배추 롤이 식탁을 지켰다. 일요일의 아쉬움을 간직한 음식을 남편과 아이들 밥 위에 하나씩 올렸다. 언제나 응원한다는 내 짧은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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