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요리는 계획적이거나 즉흥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무얼 먹을까 생각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한 그릇을 만들어 내면 음악으로 치면 즉흥곡이다. 아니면 재료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공들여 배워가며 특별한 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의 프로젝트로 변신한다. 내가 밥상에 올리는 것들은 이 어디쯤일까.
토요일 아침은 단호박에 주목했다. 호박은 이상하게도 가을과 겨울을 위한 재료로 여겨진다. 그 계절이 지나고 나면 차츰 멀어지다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금요일 장 보러 가기 전부터 이것을 염두에 두었다. 며칠 전 아이가 단호박 수프를 먹고 싶다며 몇 번 얘기한 까닭이다.
호박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 땅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안심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해 난 그동안 전해 들은 정보들로 이미지를 완성했다. 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두 축이 내 마음에 들어와 옹벽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 진초록인 호박을 골랐다. 잠들기 전 빵 몇 조각과 샐러드, 수프가 함께 하는 아침을 그렸다.
일찍 눈이 떠졌다. 늦잠 자도 될 시간에 절로 일어나게 된다. 평일과 바뀌면 좋을 습관이지만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샐러드는 야채를 깨끗하게 씻고 잘라 놓으면 끝이다. 단호박은 살짝 흐르는 물에 씻고 껍질을 벗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워낙 단단하기에 살짝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긴장한다. 속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반으로 자르니 노랑 주황의 진한 색이 겹쳐 보인다. 가끔 희미한 속살에 실망하기도 하는데, 기분 좋다. 분위기 조명을 순간 켜 놓은 듯 주변이 환해졌다.
적당한 크기로 대충 썰었다. 양파도 함께 하면 맛이 풍부해지기에 채 썰고 버터 한 조각을 팬에 놓고 볶아주었다. 조금 숨이 죽으니 호박을 더해 버터 향이 살짝 밸 무렵 물을 붓고 중간 불에서 20여 분을 끓였다. 호박에 젓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익으면 우유를 적당량 넣고 블렌더로 갈아주면 연한 크림 노란빛을 띤다. 아이가 걸쭉한 수프를 원하기에 찹쌀가루를 조금 넣고 거품기로 저은 다음 보글보글 2~3분을 유지하면 완성이다. 샐러드는 집에 있는 양상추와 파프리카, 견과류를 넣고 들깻가루 드레싱을 올렸다. 들깨의 고소한 맛을 워낙 좋아하기에 올리브유와 식초, 들깨, 매실액을 넣고 만들었다.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부드러움에 손이 바빠진다. 입안에선 격렬한 운동도 필요 없다. 뜨겁지 않은 따뜻한 온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단호박 수프는 만드는 이에게 특별한 의지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재료들이 냄비 안에서 충분히 오가며 향을 나누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도록 기다리면 된다. 단지 필요한 건 평소와는 다른 관찰자의 여유다. 라디오를 켜서 음악을 듣고 다이어리에 메모하며 아직도 꿈나라인 아이의 얼굴을 비비고 온다. 베란다로 나가 작은 상추밭과 목이 말라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난 유칼립투스 화분을 들여다보고 와도 괜찮다. 수프는 몸보다는 마음을 담아 놔두면 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요리다.
수프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묻는 질문은 낯설다. 땅의 기운을 받고 자란 재료들이 불과 물을 만나 알아서 맛을 내고 우리에게 대접한다. 물론 소금으로 간을 해서 각자의 입맛에 맞추는 조금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수프가 중심인 아침 식사는 ‘왜 나 혼자만 이리 부산을 떨어야지?’ 하는 노동에 대한 불만 불평 대신 고요한 휴일 아침을 가족들과 공유하는 너그러움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면서도 문득문득 밀려오는 피곤함과 짜증, 내 안의 불편함이 수프 앞에서는 옛일이 되었다. 내가 편안하니 남편과 아이들도 그저 회사와 학교에 가지 않는 자유의 날이다.
오랜만에 먹는 수프가 맛있다며 한 그릇 더 주문하는 아이들 틈에서 재료와 먹는 방법이 식탁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하게 많은 시간과 비싼 재료를 들인 음식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최소한의 재료로 간단하게 만들어진 것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엄마들끼리 ‘고기는 언제나 진리’라 할 만큼 실패가 없는 음식이지만 식탁에서의 풍경은 더 큰 땅을 빼앗으려는 전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때가 있다. 부지런히 정신없이 한 점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때로는 불편하다.
수프를 먹는 식탁은 한가로운 초원의 아침 공기가 주변을 감싸 안는 기분이다. 서로에게 관대해지고 즐겁다. 여기에 백 퍼센트 우유 식빵임을 강조한 빵 한 조각을 바싹하게 구워서 함께 먹으니 적당한 포만감이 괜찮다. 수프는 자연이 주는 그대로, 간섭을 최소화할 때 제맛을 낸다. 호두가 올라간 노란빛 호수 같은 수프가 나를 주방의 요리사에서 주변인으로 살짝 물러나게 한다. 급할 것도 없다. 음식을 충분히 즐기니 기쁨이 찾아들었다. 다가오는 토요일에는 숲을 연상시키는 은은한 초록 수프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