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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y 11. 2021

짜장밥이 싫어졌다

# 31

짜장밥이 서먹하다. 처음 먹어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손을 거쳐 만들어진 한 그릇이 다르게 보인다. 토요일 점심은 13년 년 만이라는 5월 최악의 황사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이런 기분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양파와 양배추를 잘게 다지고 냉동 새우를 준비했다. 야채를 기름에 볶다가 다 익어갈 무렵 생수를 조금 붓고 비닐 팩에 담긴 춘장을 적당량 덜어낸 다음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하얗던 재료들이 일제히 짙은 검 갈색으로 변하면서 본래의 빛깔을 잃어버렸다. 맛을 보니 ‘아 짜다’는 강렬함이 밀려왔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매실청을 꺼내어 서너 숟가락 넣었고 그래도 그리 변화되는 기미가 없기에 흰 설탕을 동원했다.     


소스를 먹어 보니 그럭저럭 괜찮다. 이제야 안심이다. 돼지고기가 있어야 하지만 없는 탓에 대체할 통조림 햄을 사각 썰기를 하고 끓는 물에 데쳐놓았다. 그걸 소스에 더해주고 잘 저었다. 녹말도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냉장고를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포기하고 걸쭉하지 않은 상태로 내놓기로 했다.  

뭔가 아쉬워서 달걀 프라이를 더했다. 까만 밥 위에 화룡점정으로 올리면 그래도 정성이 더해진 느낌일 듯싶었다. 밥에 소스를 넣고 네 그릇을 만들었다. 생각했던 맛이 아니다. 소스가 모든 걸 가져가 버린 듯한 아쉬움이 떠나질 않는다.     


양파의 달큼함과 양배추의 흰 피부가 그리웠다. 짜장밥을 먹는다는 건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듯 검정이 점령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짠 소스의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더해진 달콤한 것들이 어울리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외면받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겉도는 느낌이다.    

 

야채를 싫어하는 애들에게 휴일까지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내 그릇에만 오이와 양파 깻잎을 썰어 넣었다. 까만색이 가능한 보이지 않도록 감췄다. 그때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숟가락으로 잘 비벼 먹는데 맨 처음보다는 그럭저럭 지나갈 정도가 되었다. 

    

나만이 불편한 식탁이다. 춘장이 본래 맛이 어떤지 염두에 둔 적이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짜장면을 비우기에 바빴다. 춘장을 검색해 보았더니 중화요리에 쓰이는 조미료라는 설명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조미료, 음식의 맛을 알맞게 맞추는 데에 쓰이는 재료. 다시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된다. 모든 음식은 이것으로 맛을 내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불편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몸에 별로라는 선입견이 작용한다.


춘장은 그저 제 역할을 다 했다. 내가 그날 까만 춘장으로 만든 짜장 소스가 싫었을 뿐이다. 간단해서 온갖 것을 동원하지 않아도 중간 이상을 해 주는 그것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출발한 음식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탓을 하고 있으니 참 웃기다.     


내게 솔직해져야 할 시간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며 애써 내가 바라는 먹을만한 맛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시시각각 변하는 게 맘이라고 하지만 시소 타듯 출렁이니 당황스럽다. 다른 이들은 짜장밥이 맛있다고 좋아하는 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몸이 순수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인지 궁금했다. 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한 최근에는 가능한 절제된 양념을 사용하려고 한다. 샐러드와 반찬을 만들 때 재료가 지닌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조리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습관이 상전벽해가 되기는 어렵다. 무엇을 더 넣고 싶다가도 거기에서 멈추는 정도다. 쓴맛이 나는 나물은 그런대로, 달콤한 방울토마토의 몰랐던 세계를 알아가고, 언제나 가까이하는 표고버섯과 새송이버섯 요리는 소금과 올리브 유면 끝이다.     

생활의 이런 변화에 몸이 답하기 시작하는 걸까? 소스의 진한 맛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론 긍정적인 신호 같다. 혼자 이방인이 된 것처럼 식탁에서 머뭇거렸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몸과 마음의 소리라 생각하니 반갑다.     


일주일 전쯤 카레라이스를 먹을 때도 비슷한 상태였다. 그동안 몸에 익은  스타일로 요리했는데 이상했다. 카레의 맛보다는 다른 것들이 끼어들어 장난친다는 기분이었다. 순수한 카레라기보다는 최적이라고 여겨지는 성분들이 더해진 인스턴트 카레 가루로 만들었으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마트에 가면 모든 요리가 해결될 만큼 다양한 소스가 판매된다. 그것들은 누구나 즐길만한 정도로 점점 세분화되어 발전해 간다. 그 와중에 춘장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난 너무 과도한 마음씀 일까. 어느 맛이 진짜고 어느 것이 별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나의 이런 집착이 쓸데없는 피곤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짜장 소스를 가까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짜장밥을 먹으며 혼자 유난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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