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부엌은 내게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하게 한다. 먹고 싶은 것을 그려보고 내 마음대로 만들어 보고 맛본다. 때로는 실망하고 생각보다 기대 이상일 땐 감동한다. 매일 음식 만드는 일이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대부분은 평균 이상 좋은 감정이지만 가끔은 지겹거나 힘들다.
집밥에 오르는 게 그 나물에 그 반찬처럼 반복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차이를 발견한다. 고추장으로만 무쳐내던 나물에 어느 날은 고춧가루가 더해졌고 달큼한 간장이 중심이던 제육볶음이 고추장의 무거운 옷을 입은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 여기에 가끔은 참기름 대신 들기름, 마늘 대신 양파가, 쪽파의 자리를 부추와 대파가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비슷해 보일 뿐이었다. 모두가 다른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것을 만들 계획을 세워두는 순간부터 작은 설렘이 시작된다. 일상이 된 요리도 새로움이 필요하다.
며칠 전이다. 티비에서 작곡가 정재형과 절친인 가수 엄정화가 나왔다. 둘이 음식을 먹는데 당근 라페라 불리는 프랑스 스타일의 당근 샐러드가 나왔다. 라페가 프랑스어로 잘고 가늘게 썬다는 의미처럼 당근을 가늘게 채 썰어서 만든 샐러드다.
내 눈이 그들의 식탁에 고정되었다. 당근의 주황빛이 점령해 버린 신선함이 살아있는 샐러드에 꽂혔다. 당장이라도 만들고 싶었지만 키가 되는 올리브유가 없다. 마트에 달려가야 했지만 귀찮음이 발동했다. 잠시 숨 고르기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당근, 그저 음식의 색깔을 입혀주고 비타민 에이가 많은 채소 정도로 알고 있었다. 몸에는 좋지만 그것이 주인공이 될 만한 요리는 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당근 케이크를 만든 적이 있지만 밀가루에 파묻혀 버린 탓에 오롯이 당근 맛을 보기가 어려웠다.
만드는 법을 알고 싶어서 검색해 보니 간단했다. 당근과 소금, 올리브유, 홀그레인 머스터드, 레몬즙을 넣고 버무린 후 맛이 어우러지도록 냉장고에 두었다 먹으면 된다. 토요일 장을 보면서 올리브유를 사다 두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뚝딱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집에 있는 당근을 꺼내어 채 썰고 소금에 절였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꼭 짠 후에 올리브유만 조금 뿌렸다. 없는 재료는 생략한 나만의 당근 라페.
아삭하면서도 적당히 소금이 스며들어 색은 더 진해진다. 단단하면서도 촉촉하고 강단 있음 직한 당근 향이 올라온다. 복잡한 요리는 부담이 되는 탓에 자주 먹기는 힘들다. 특별한 때를 빛내주는 장식 같은 게 되어버리는 순간 친해지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 건 언제나 가능할 것 같다.
다 나가고 혼자 있는 점심을 당근 샐러드와 함께했다. 주위를 환하게 해주는 당근 빛깔만으로도 그저 좋다. 분주하게 많은 것을 차릴 것도 없고 집에 있는 빵 한 조각이나 떡과 함께면 텁텁한 맛을 날려주면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일요일 아침에 이어 이틀 동안 점심을 책임져 주었다.
언니가 보내준 생치즈를 당근 위에 올렸다. 하양, 주황, 갈색의 빵까지 삼색 샌드위치가 즉석으로 만들어졌다. 한입 크게 벌려 먹으니 행복이 몰려온다. 잘 몰랐던 맛이다. 어디에서 맛본 것 같으면서도 충분히 느껴보지 못했던 세계에 빠져든다.
초등학교 겨울방학이었다. 엄마가 아는 이가 준 당근을 비닐 가득 들고 온 적이 있었다.
“당근을 살짝 데쳐서 마요네즈에 버무리면 맛있다고 하더라.”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내게 전했다. 먹는 일에 관심이 많던 나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당근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런데 집에 마요네즈가 없다. 잘 먹지도 않으니 챙겨놓을 리가 없었다. 십여분 거리에 있는 사거리 슈퍼로 추은 날씨에도 달려갔다. 가장 작은 크기의 그것을 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곧바로 실행해 옮겼다.
깍둑 썰기한 당근을 끓는 물에 잠깐 담갔다가 꺼내고 마요네즈를 듬뿍 짜서 버무렸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손으로 하나를 집어 먹었다. 마요네즈의 진한 맛에 당근이 살짝 주저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것이 오롯이 당근만을 먹었던 첫 기억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다. 다른 재료 없이 당근만을 샐러드로 만들어 먹으니 혼자 들뜬다. 고요한 집 거실을 왔다 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다 접시 하나를 앞에 두고 여유를 찾았다.
당근 라페는 튀거나 모나지 않은 수수함에 살짝 세련됨이 더해져 지루할 틈이 없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내 모습을 문득 보게 되었다. 물건을 찾는 일에는 바로 앞에 놓여 있어도 못 볼만큼 살피는 일에 세심하지 못하다. 무엇을 만드는 과정에도 순서가 있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힘에 부쳐 끝까지 해내기가 쉽지 않다.
요리만큼은 예외다. 요리는 어떤 것이든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간단히 기억해 낸다. 밥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게 그저 편했을 뿐인데 오늘따라 고마운 마음이다. 내 손을 거쳐 접시에 올려진 음식 앞에서 나만의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다.
새로운 먹거리에 대한 도전은 가보지 않은 세상에 접어드는 길목이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관찰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음식을 위해 재료를 깨끗하게 씻고, 썰고, 조리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손을 거친다. 먹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몰랐던 것들을 확인하고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다. 당근 샐러드가 그러했다. 당근 향이 이번처럼 오래 머물다 간 적이 없다. 아삭 거리는 당근을 먹으며 당근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