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아침밥으로 김밥을 먹기로 했다. 밥은 어제 해 놓은 게 밥솥에 있었고 몇 가지 재료만 준비하면 된다. 당근과 상추, 깻잎, 유부에 참치를 넣기로 했다.
야채를 깨끗이 씻고 유부는 언제나처럼 데쳤다. 참치도 기름을 뺀 다음 고추장 한 숟가락을 넣고 잘 섞었다. 채 썬 당근에 소금을 뿌려두었다가 물이 생길 무렵이면 손으로 꼭 짠 후에 식용유를 팬에 두르고 살짝 볶았다.
유부는 며칠 전 만들어 둔 갈비 간장 양념 몇 스푼을 넣으니 더 할 게 없다. 물엿만 살짝 뿌려주었다. 손으로 조물조물 한 다음 팬에서 살짝 볶았다. 밥을 넉넉한 볼에 담고 김을 편 다음 재료를 올려놓아서 돌돌 말아준다.
김밥 여섯 줄을 만들었다. 주황색 당근 빛이 강렬한 김밥이다. 접시 가득 썰었다. 김밥을 본 아이들은 생각지도 않은 야채의 행진에 놀라면서도 김으로 돌돌 말아주니 잘 먹는다.
김밥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난 밥에 대한 마음이 유독 강했다. 어릴 적부터 꼭 흰쌀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 밥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내게 김밥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만능이었다.
요즘에는 김밥에도 계절을 담고 싶어 졌다. 꽃처럼 피어나는 상추와 깻잎을 넣은 것도 이런 이유다. 며칠 전에는 오이가 잔뜩 들어간 김밥을 만들었다. 싱그러운 오이향이 올라오면서 새로운 맛을 전했다.
“아 여름 김밥이구나.”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상추의 아삭하고 풋풋한 맛에 깻잎의 톡 쏘는 향이 입안에서 머문다.
김밥은 주부로서의 책임감과 벗어나고픈 마음이 충돌할 때 종종 등장한다. 예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뿌듯함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자존감이 급상승하다가도 그건 잠깐이다. 반복은 종종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의 싹을 틔우게 한다.
무거운 것을 들었던 탓인지 허리에 무리가 왔다. 특별히 통증이 강한 건 아니지만 불편한 느낌이 내내 거슬린다. 그러면서도 답답함이 목까지 차오르는 주말이었다. 다른 날보다 잠은 더 일찍 깨었고 떠오른 게 김밥이었다.
밥이면서도 그럭저럭 무얼 먹었다는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 적당히 간편한 걸 고민했다. 이것저것 손이 가기도 하지만 김밥이 완성되고 나서 썰었을 때의 단면은 작은 그림이 된다. 김밥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화사한 김밥을 보고 나니 내 우울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김밥은 가족과 나 사이의 만들어진 적당한 절충점 같다. 십여 년을 주부로 지낸 탓인지 밥상을 차려야 마음이 편하다. 몸 상태가 별로였지만 가만히 누워있기도 싫었고 움직이는 게 나을 듯했다. 동네 분식집이나 편의점에서 사다 먹어도 될 일이지만 김밥만큼은 내 손으로 만든 게 이상하게도 맛나다. 이러니 아침밥을 준비한다는 목적의식과 김밥을 먹고 싶은 내 욕구가 이 시간만큼은 잘 버무려졌다. 그렇게 탄생된 김밥이다.
이날 김밥은 어느 때보다도 화려했다. 여름의 강한 햇볕 아래서도 고개를 숙이고 그늘을 만들며 꽃을 피우는 능수화를 닮았다. 제 일하는 이 꽃을 보며 사람들은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여유를 찾는다. 아침 김밥을 통해서 나를 보았다. 그냥 생각나서 나온 김밥이 아니었다. 주부의 삶에 익숙해진 나와 오롯이 나이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그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