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약속해 버렸다.
“엄마 내일 감자 치즈 고로케 해줘요.”
“응 알았어. 내일 오후에 해 줄게.”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다음날 오후 감자 다섯 개의 껍질을 벗기고 삶았다. 30분을 기다린 후 잘 익은 감자를 그릇에 넣고 잘 으깬다. 생치즈를 깍둑썰기 했다. 계란물을 만들고 빵가루와 밀가루를 조금 준비했다. 감자에 치즈를 넣고 손으로 굴리며 둥근 모양을 만든다. 밀가루 옷을 아주 살짝만 입히고 계란 물에 퐁당 샤워시킨 다음, 빵가루 옷으로 치장하면 준비가 끝난다.
감자는 조금이었는데 열네 개가 나왔다. 이제부터는 에어프라이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식용유를 뭉쳐 놓은 감자에 조금씩 뿌려서 건조하지 않도록 해 준다. 180도에서 15분 뒤집어서 8분 정도를 구웠다. 열을 받을수록 치즈가 살짝 삐져나와 방울을 만들며 뽀글뽀글 익어가는 모습이 귀엽다.
한 시간 좀 넘게 신경을 썼더니 모양부터 귀여운 크로켓이 완성되었다. 아이들과 남편의 오후를 즐겁게 해 준 간식의 탄생이었다. 내게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특별한 것이었다.
약속의 무게를 느꼈다. 내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생각해 볼게’와 ‘알았어. 해 줄게’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단어가 전하는 것처럼 고스란히 생각해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후자는 무엇을 사는 일이든, 음식을 만드는 것이든, 놀러 가는 일이든 그렇게 하자는 확답의 의미다.
오후 3시를 넘길 무렵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몸이 피곤하고 살짝 귀찮았다. 그냥 깜박했다고 하고 지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해 주기로 이미 한 일인데 핑계를 대는 게 조심스러웠다. 방법은 딱 하나다. 그냥 만들어야 했다.
아이가 크로켓을 먹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 올라 한 말일 것이다. 안 먹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실망할 모습이 그려졌다. ‘알았어. 해줄게’라며 기꺼운 마음을 보인 나를 나무랄 뿐이다. 몇 분을 망설인 끝에 감자를 꺼냈다.
얼마 전부터 약속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지켜야 하고 마음이 쉽게 변할 것 같은 일은 꺼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그게 편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만남을 기다리던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카톡 메시지에 마음이 상했던 일이 스친다. 갑자기 일이 있어서 다음에 보자는 말이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사정이 있겠지만 몇 번 그런 일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다짐 같은 게 싹텄다.
크로켓을 만들고 나니 마음이 가볍다. 요리하는 과정에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다.
"엄마 정말 만들었네. 맛있겠다. 고마워요."
아이가 학원을 다녀와서 깜짝 놀란다. 엄마가 대답은 했지만 별로 기대를 안 했던 모양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먹는 일에 대한 약속을 종종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지나가는 말로 한 게 해야 할 것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티비에서 나오는 것들을 보고 먹고 싶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이들을 보면 절로 나오는 말이 있다.
“엄마가 해줄게. 저거 정말 쉬운데.”
절반의 약속인 셈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며칠 후 아이들을 통해서 그 얘기가 다시 나온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레시피를 검색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식탁을 채웠고 아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조금씩 경험했다.
내가 너무 신중한 걸까? 하기 싫을 때는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넘겨 버리는 게 유연한 것일까? 내게 질문을 던진다. 약속을 지켜가는 건 불확실성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가는 행동 같다. 크로켓을 완성하고 나니 하루의 어긋나 있던 일들이 퍼즐을 맞춰나가듯 정리가 되어간다.
지나가는 말로 약속 아닌 약속을 무심코 던진다. 어느 한쪽이라도 그것에 의미를 두는 순간 그냥 말이 아닌 지켜야 할 일로 변해버린다. 약속의 마법이며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