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이 가까워진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이가 다가왔다.
“엄마 오늘 있잖아. 분홍소시지 먹을까?”
갈등하던 내게 답을 주었다.
동네 마트에서 기다란 그것을 사 왔다. 햄은 진열장 중앙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건 냉장고 맨 아래 칸 정신없이 이것저것 놓여있는 곳에 가만히 있었다. 흐른 시간만큼이나 소시지의 위상도 변한 것 같다. 두 개의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었는데 포장 비닐이 강렬한 분홍인 것으로 골랐다.
밥 먹는 재미가 제일이었던 초등학생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무 책상 위로 도시락을 꺼내 놓고 함께 먹었다. 이 시간에는 유독 주목받는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반찬통에는 언제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정성스럽게 계란옷을 입은 소시지가 가지런히 담겼다.
“나 하나 먹어도 돼?”
친구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단 한 번뿐인 기회다. 그의 자리를 오가는 아이들이 늘어갈수록 반찬통은 바닥을 드러낸다. 더는 묻는 일이 미안해진다.
소시지 부침 한 개는 쉽게 얻기 힘들었기에 더더욱 특별했다. 밥 위에 올려놓고 아주 조금씩 먹어도 금세 사라진다. 채워질 수 없는 아쉬움은 점심때마다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무도 소시지를 쉽게 볼 수 없었다.
소시지 반찬은 단지 먹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과 연결되었다. 과수원 농사가 대부분인 시골이었다.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종일 밭에서 지내는 부모들은 도시락 반찬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로운 살림도 아니었다.
소시지 반찬을 즐겨 챙겨 오던 친구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부모의 직업이 무슨 상관있을까 싶지만, 굴곡 없는 생활이 가능했다는 점이 보통의 반 친구들과 구분되었다. 겨울 귤 수확으로 일 년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 비해 안정적이었다.
어린 나 역시 이런 상황들에 대해 어렴풋이 알았다. 도시락 반찬이 나와 친구의 집안 형편까지 들여다보게 했다. 제삿날이나 마을 잔치에 모인 어른들로부터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일이 편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이때부터 소시지는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소시지는 보이지 않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었다. 인기투표를 하면 금방이라도 분홍이 빛나던 도시락 주인인 친구가 당선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 집은 아이 셋이 초중학교에 다녔고 버는 것보다 쓸 일이 많은 탓에 넉넉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설령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미래를 위해서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가성비로 따졌을 때 소시지는 사치였다. 김밥을 쌀 때는 화룡점정으로 쓰였고 아주 가끔 서너 개가 내 도시락에 담겼다. 아이가 많으니 그것을 한쪽에 몰아주기도 어려웠다. 그야말로 맛만 보는 게 전부였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다. 장을 보는데 통통하고 긴 막대 같은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는 그리도 먹고 싶어도 못 먹던 소시지다. 얼마나 맛있을까 하고 그날 저녁에 옛 방식 그대로 부쳤다.
흐른 시간만큼 입맛이 변했는지 별로다. 밀가루와 화학적인 것들이 잘 버무려진 느낌이다. 아이들은 한두 개를 집다 말았다. 그 후로는 멀리하다 최근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큰아이가 찾는다. 아이를 핑계로 먹어보면 어릴 적 그때가 떠오르면서 맛이 괜찮다. 분명 같은 소시지인데 예전에는 별로였고 지금은 별미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인지 옛날 소시지 맛이 살아났는지 모르겠다.
희소성의 원칙이 작용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다. 오히려 역전됐다. 햄은 아이들에게 친숙하고 소시지는 이방인 같다. 그러니 가뭄에 콩 나듯 오르는 이것에 끌리기 마련이다. 아이에게도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식탁에 오를 때마다 설명해 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이는 소시지를 종종 먹고 싶다고 한다.
시간은 절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소시지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여러 감정을 들여다보게 했다. 엄마에게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끝까지 얘기하지 못했던 내가 있다. 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썼고 때로는 한발 더 나아가 걱정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애 어른으로 참으로 힘들었던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분홍소시지는 추억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내 마음속 어느 곳에서 꼭꼭 숨겨둔 바라보기 힘든 나 일지 모르겠다. 접시 가득 소시지를 쌓아두었지만 그리 서두르는 사람은 없다. 이젠 소시지에 목말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