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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15. 2021

레몬밤 바라보기

 

기대와 기다림은 한줄기다. 기대라는 건 단숨에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니 시간을 잘 보내야 가능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름의 노력이라도 해본다지만 내 손에서 벗어난 것은 그것마저 힘들다.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동생을 업고서 긴 골목에서 엄마를 기다렸던 8살이던 내가 떠오른다. 약속된 때는 훌쩍 넘겼고 마음만이 바빠지는 시간, 사람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길게 빼 보지만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뭐라고 말하고 싶어도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저 엄마가 오기만을 그리며 견디어낼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밥 먹고 그림책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있다. 이날도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시골 창고를 개조한 높은 천정의 카페는 이국적이면서 고요했다.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이 어두컴컴해지며 한참이나 소나기가 퍼부었다. 비 온 뒤 세상은 싱그러움 자체다. 카페 주변으로 초록 풀들이 빛난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주변을 산책하다 먼저 눈에 들어왔던 싱싱한 그것들이 궁금해졌다. 가까이 가 보니 풀은 아닌 듯했다. 입을 만졌더니 진한 향이 퍼진다. 허브다. 주변을 정리하던 주인어른이 레몬밤이라 알려주었다.      

매일 자라고 있는 레몬밤

단단한 줄기에 독특한 향에 이끌려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 것이 아니었기에 망설여졌다. 함께 온 이들에게 물었다.

“이거 줄기 하나만 꺾어가도 되겠죠?”

이미 그리하리라 마음먹었으면서도 꺼지지 않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괜찮아. 여기 이렇게 많은데.”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용기를 내었다. 가위 없이 줄기를 자르는 일도 힘들었다. 힘을 주니 한줄기가 내 손에 담겼다.     


집에 오자마자 물에 꽂았다. 워낙 줄기에 강한 에너지가 느껴지니 금세 뿌리를 내릴 것 같았다. 그러기를 사나흘째 잎이 조금씩 노랗게 변해간다. 물에 담겼던 줄기 부분은 아직 미동도 없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빵을 포장했던 종이상자에 구멍을 뚫은 다음 흙을 적당히 담았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손색없는 화분일 듯했다. 그렇게 레몬밤 가지를 가위로 적당히 자른 다음 꽂아 두었다.   

  

하루 이틀 지나고도 쌩쌩하다. 이때부터 뭔가 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가끔 들여 다 보며 흙이 말랐으면 물만 조금씩 주었다. 이제 십여 일이 지나는데 새싹이 돋았다. 두 개뿐이던 잎에서 옆으로 어린 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보다. 자연이 해주는 일이기에 뒷짐 지고 있을 뿐이었다. 햇살이 너무 강한 날은 반음지로 화분을 옮겨주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했다. 마음과 몸을 쓰며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날 보니 새로 돋은 작은 초록 잎으로  인사를 건넸다. 집안일을 하다 낮이면 온라인으로 수업 듣는 아이에게 점심을 차려주느라 허브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애초부터 내가 할 게 없다는 생각에 내버려 뒀다. 결과는 아직까지는 괜찮다. 상자 안에서 작은 뿌리라도 내린 것이 분명하다. 가지가 더 튼튼해진 느낌이다.    

  

기다림은 적당한 거리다. 온 정신을 모아 신경 쓰지 아니하고 흐르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 결과에 따라서 나무랄 것도 없이 담담하게, 문제가 있다면  다시 선택하면 되는 일들이다. 화를 불러올 일도 없으니 평온하다.     


식물을 대할 때는 이런 게 무리 없이 되지만 사람 사이에서는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자리는 늘 현실과 이상을 오간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요동친다. 꾸준함을 유지하는 게 그리 간단치 않다.   

   

“공부는 애가 하는 거지 머. 난 생활습관만 신경 써.”

주변 사람들이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쿨한 엄마처럼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아이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때로는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시간 활용 잘해야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내가 선택하는 거야.” 

지금 돌아보니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어른인 나조차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을 아이에게 은근히 압박하는 모양새다. 아니라고 하면서 아이에게 향하는 바람을 감춘 채 살아간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따갑다.

      

식물을 향한 내 마음처럼 그저 시간 속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가 잦은 요즘 허브는 더 자란듯하다. 소리 없이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레몬밤에 대한 내 마음의 거리, 그 지점에 멈추어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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