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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8. 2021

수박의 시간입니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했다. 내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하나씩 해야 했다. 내 속도로 한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버리면 쌓이고 쌓여서 주저앉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먹을 것을 정리하는 것.  

   

어제저녁부터 수박을 냉장고에 넣을 것인지 고민하다 아침에 하기로 했다. 베란다 그늘에서 혼자 놀고 있는 녀석을 들고 부엌 싱크대로 가져왔다. 샤워기로 대충 씻기고 들어서 냉장고로 직행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에 부딪혔는지 ‘퍽’하는 소리가 고요한 집에 울린다.     


순간 아차 했다. 수박에 일이 났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식탁 위에 수박을 올려보니 주변에 지진이 나서 둥근 선을 그리며 금이 갔다. 기분이 별로다. 솔직히 화가 났다.     


지난번 수박에 이어 벌써 두 번째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장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찰나였다. 위층 사는 이가 내리는 걸 피하려다 들고 있던 수박이 엘리베이터 모서리를 스쳤다. 그때도 ‘쩍’하는 울림이 지났다.      


누굴 탓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어쩌다 일어난 일이었지만 연이어 두 번이다 계속되다 보니 마음이 안 좋다. 휴일이라 식구가 모두 잠을 자고 혼자 씩씩댔다. 이른 시간부터 왜 수박을 들었는지, 요즘 들고 온 수박마다 말썽을 일으키는지 중얼거리며 투덜댔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회복된다. 수박은 그동안 답답한 하우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어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을 거다. 수박 입장에선 이렇게 예상치 않은 사건을 만나게 되어 멋진 모습이 일그러졌으니 속상하겠다 싶다.     

'퍽' 소리가 요란했던 수박

입하를 보내고 하지도 지났다. 여름은 깊어졌고 수박을 챙기는 횟수도 늘어간다. 밥 먹는 일만큼이나 끊이지 않는다. 아침을 제외한 하루 두 번 이상이다. 상처가 난 수박은 옆으로 달콤한 물이 흐른다.     


그냥 놓아둘 수가 없다. 가운데를 칼로 잘랐다. 충격이 컸는지 안은 조금 일그러졌다. 작은 조각을 입에 가져가니 달콤하면서도 아삭한 맛이 일품이다. 수박은 그대로인데 보이는 모습에 실망하고 마음을 썼나 싶다. 속상했던 게 조금씩 사그라진다. 이 녀석이 앞으로 며칠간을 내게 행복을 줄 것이다.  

 

수박은 여름과 닮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보다는 조금 순해 보이는 붉은 속살과 짙은 줄무늬 초록 껍질은 계절의 색을 온전히 품고 있다. 참외로 시작되는 여름은 수박으로 완성된다. 양손을 동원해야 들 수 있을 만큼의 무게로 땀을 식혀줄 물을 잔뜩 채워놓고 있다. 가게 어디서나 수박은 여름 과일의 제왕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당당하게 앉아 있다.      


수박 하면 작은 산을 이루듯 가득 쌓아 올린 오일장 풍경이 생생하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었다. 엄마와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장에 갔다. 이것저것 바구니를 채우고 마지막에 엄마가 수박 장수 아저씨와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는 생각처럼 가격을 깎는 일에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수박 한 덩이를 샀다. 마지막으로 잘 익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저씨가 삼각형으로 귀퉁이를 작게 잘라 붉은 속살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잘 익어 합격점을 받았다. 베어진 그건 블록을 맞추듯 수박 안으로 직행했고, 한 몸이 되어 함께 집으로 왔다.     


수박은 과수원 한편에서 자라는 물외나 참외가 전부이던 중산간 마을에서 어쩌다 먹는 귀한 것이었다. 여름의 절정일 광복절 무렵 할아버지 제사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꼭 수박 한 덩이가 올랐다. 트럭을 몰고 이 동네 저동 네로 수박 장수가 다녔지만 뜨거운 태양은 신선도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수박을 만나는 일은 행운이었다.     


여고생으로 자취하던 때는 집에 내려가지 않으면 수박은 구경도 못 했다. 냉장고는 작았고 혼자 사는 까닭에 비싼 그 큰 걸 사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수박 없는 냉장고는 허전하다 못해 마트로 발을 급히 돌려야 할 것 같은 조급함마저 들게 한다. 빈 쌀독을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처럼 수박이 냉장고 안에 있어야 편안하다.     


이제 수박은 최첨단의 당도 측정기를 활용하는 까닭에 속을 열어 보여야 할 불편함은 없다. 대부분은 잘 익고 맛 좋은 상태로 소비자를 찾는다. 가격 때문에 실랑이를 벌일 일도 없다. 마트마다 크기에 따라 조금씩만 차이 날 뿐 비슷한 가격이다. 수박의 평균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땀을 많이 흘리진 않지만, 기온이 올라가면 이상하리만치 몸이 괴롭다. 누가 내게 다가오는 일도, 혼자 앉아서 무얼 하는 것도 힘겨울 때가 많다. 그때 내가 거부하지 않는 것. 언제나 환영하는 건 수박이다. 여름날에 대한 기대가 수박만큼 부풀었다. 어느 날 마음처럼 안되어 펑 터져버릴지라도 깨진 수박이 역시 수박이었던 것처럼, 여름이 내게 전할 무엇을 기다려 본다. 수박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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