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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29. 2021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는 이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란 카피가 오래전에 인기를 끌었다. 한참이나 지난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전한다. 지금은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말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 내 삶이 조금씩 발전하고 변한다고 강조한다. 표현 과잉의 시대란 말도 낯설지는 않다. 침묵하는 자는 마치 생각이 없는 것처럼, 혹은 무관심한 사람처럼 단정해 버린다.     


사회 문제에도 의견은 많지만, 밖으로 크게 꺼내놓지 않는다. 아침을 먹으며 남편과 흥분하며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비판과 푸념을 늘어놓는 게 전부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다가가 보면 더 소리가 없어진다.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밖에 놓여 있거나 외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마음 깊숙한 곳에 두고 바라보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건 오래된 내 습관이자 넘어야 할 산이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나만의 자세다.   

   

더워지는 날씨에 비도 잦고 습해지고, 몸이 힘들어지는 계절이 왔다. 늦은 오후 무렵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부터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미루다 며칠이 지났다. 

“엄마 잘 있지?”

“응 잘 지내지. 이틀 전에 코로나 주사를 맞았는데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해서 집에서 꼼짝 않고 쉬고 있어.”

“엄마 언니가 약 사다 놓았을 텐데. 그거 먹고 계속 불편하면 병원 가요. 약은 꼭 4시간 간격을 지키면서 먹어야 해요. 아프다고 그냥 막 먹으면 안 되고. 알았지.”

“알았어. 그래 괜찮다. 아이들이랑 강서방은 잘 있지. 내 걱정하지 말고 식구들이나 잘 챙겨라.”

“엄마 혹시 많이 아프면 이모네라도 전화해서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해요. 알았죠.”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함께 사는 언니는 출장을 가서 일요일이나 되어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1차 접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까닭에 잊고 있었다. 혼자 집에서 끙끙 앓았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에서 뭔가 울컥했다. 그렇다고 해서 빨리 달려갔다 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다. 시계는 6시를 달려간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     


양파와 감자를 썰고 된장찌개를 준비하는데 엄마가 계속 걸린다. 한두 시간 버스로 갈 수 있는 거리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다. 비행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물리적 거리가 심하게 야속하다.   

  

하루, 이틀, 사흘을 보내는 동안 문득문득 엄마의 상태가 궁금하다. 걱정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한다. 일하는 순간 사라졌다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부풀어 오른다. 괜찮겠지 여기면서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전화를 걸어 보면 될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싫다. 내게 습관처럼 굳어진 직면에 대한 어려움이다. 좋은 일을 마주하는 건 아주 간단하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덕담을 나누면 그만이다. 그와 반대인 상황은 가슴 아프고, 상당한 무게를 견뎌내야 하는 힘이 필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다 좋을 수도 없지만 어려운 상황 앞에서 난 상당히 작아진다. 엄마의 일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시 확인해서 여전히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더 크다. 며칠을 버텨내니 월요일이 되었다. 언니는 돌아왔을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정리가 되었을 것 같아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엄마 괜찮아요.”

어디를 걸어가는지 조금은 숨차 보이지만 씩씩하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응 괜찮아. 이제는 열도 안 나고. 과수원에 갔다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엄마 내가 많이 걱정했어. 전화할까 하다가 가보지도 못하니 연락도 안 했어.”

“아이고 우리 딸이 엄마 걱정 제일 많이 해주는구나. 고맙다.”

엄마 목소리가 돌아왔다. 뭐라 하지 않아도 전화에서 들리는 또렷한 음성이 모든 상황이 안정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돌이켜 보면 마음이 쓰일 때마다 전화해도 될 일이었다. 확인하지 않는 상황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이었다. 어느 범죄 심리학자가 정기적으로 관계를 갖지 않다가 갑자기 전화가 오면 불안이 증폭된다고 한다. 내가 딱 그랬다. 집에 전화는 가끔 이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크고 작은 집안일을 겪으며 현실을 외면하려는 내 몸부림이었다.  

여기에 내 삶의 문제가 더해질 때 더욱 그러하다. 보통의 일상이 유쾌하지 않을 때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 또한 거리를 두게 된다. 어떤 이는 오히려 그럴 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하지만 난 반대다. 내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저 외면하는 시간을 길게 갖는다.  

    

중년이 깊어지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잘 되기를, 무탈하기를 소원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위안하며 마음으로 빌어 줄 뿐이다. 

 

두려움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안 본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보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진다. 전화기를 들지 않는 건 그걸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나를 보호하려는 이기적이면서도 슬픈 내 모습이다.  

“방학 때 오면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 밤새도록 나누자.”

엄마에게 이런 마음을 전해야겠다. 엄마의 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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