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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l 05. 2021

여름 색에 스며들다

 

비가 세차게 내렸으면 좋겠다. 주말 저녁 뉴스 기상예보에는 내가 사는 곳을 지나는 먹구름은 없다. 그저 내리다 마는 비인 모양이다. 비가 물 폭탄으로 변할 때는 무서우면서도 경쾌함에 빠져든다. 주변을 빠르게 청소하는 능력에도 놀란다.     


비를 기다렸다. 한편으론 습기를 순간 빨아들일 만큼의 강렬한 태양을 바라면서도 비가 그리운 건 외면해 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그저 편안하다. 흐르는 빗물이 주변을 감싸 안아 준다.     

 

오락가락하는 날씨만큼이나 복잡한 가슴속을 붙잡아 주는 게 있다. 여름의 빛깔들에 시선이 멈춘다. 이때면 만나던 그것들이 다시 보인다. 여름 과일들과 채소, 오롯이 자연이 선물한 색깔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먹지 않아도 마음을 빼앗긴다. 흔들리던 마음을 멈추고 잠깐의 쉼표를 찍는다.  

시작은 블루베리였다. 5월 어느 날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검으면서도 보라색이 함께 섞여 있는 작은 방울이 귀엽다. 몸에 좋다는 생각에 마트에 갈 때마다 한 팩씩 샀다. 어떤 때는 달콤함에 손이 쉴 틈이 없고 때로는 코끝이 올라가는 신맛에 실망한다.      


어떤 게 맛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보물찾기 하듯 눈을 크게 뜨고 쌓여 있는 것들에서 마음이 가는 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싱싱한 단맛이다. 하얀 설탕 가루를 아주 살짝 뿌려놓은 듯 흰색이 겹쳐지면서 빛난다.     


새로 알게 된 플럼코트도 있다. 우리말로 하면 자두살구.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는 로컬푸드 매장에서 6월부터 선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두인 줄 알았는데 가격표시를 보니 이름이 다르다. 다른 이들에게도 생소한가 보다. 과수원에서 바로 수확한 것이라 이틀이나 사흘 정도의 시간을 두고 먹으면 맛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살까 망설이다 돌아섰다. 두 번째도 그랬다. 그러다 맛이 점점 궁금해진다. 일주일을 보내고 오천 원을 주고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그걸 바구니에 담았다. 연두와 노랑이던 것이 점점 붉은빛을 낸다.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나는 살구는 사라졌다. 대신 자두와 살구의 중간에서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조화가 썩 괜찮다.     


대학을 졸업하고 맞는 첫여름휴가였다.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정선으로 향했다. 두 갈래 물이 어울려 한데 모이는 나루, 아우라지에 이끌려 아무런 예약도 없이 나선 까닭에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한창 휴가철이라 잠잘 방조차 없었던 것.     


다행히 민박집을 찾았지만, 하룻밤만 잘 수 있는 방이 전부인 곳이었다. 배는 허기졌고 주변을 둘러보니 할머니 한 분이 주황색의 맛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팔고 있었다. 싼 가격으로 준다는 말에 작은 바구니 가득 담긴 그것을 삼천 원을 주고 사서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살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잘 익은 플럼코트

그 후로 살구는 뽀얀 색에 마음이 가다가도 옛날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자두와 만났다고 하니 신기했다. 자두가 과육에 비해 큰 씨로 먹을 게 별로 없는데 그 점을 보완해서 살구의 탱글탱글한 식감에 자두의 달콤함을 더했다. 껍질은 살짝 거친 복숭아다. 씨는 매실 정도로 작다. 아이가 다시 먹고 싶다고 해서 사러 가보니 나오는 시기가 이미 지났다 한다. 아쉬움이 가득 밀려온다. 여름도 망설이다 지나버리면 어떤 기분일까.      


밥을 차리다 금요일에 담가 둔 열무김치를 접시에 담는데 색이 참 곱다. 언제나 이때면 오르는 단골 찬이지만 오늘따라 새롭다. 열무의 물기 가득 머금은 연둣빛과 단단해 보이는 통통한 줄기, 먹구름 사이에도 벌써 익어버린 홍고추, 보라색 양파까지 환상의 조합이다. 김치가 아닌 여름 풍경이다.


찰옥수수도 나왔다. 보라와 갈색 어디 즈음에 있는 묘한 빛깔이다. 비 오는 날 딸랑이 솥에 옥수수를 삶는 동안 특유의 고소한 냄새에, 비가 몰고 온 습기가 더해져 진하다. 매일 새로운 색들이 등장하는 시기다. 어린것들은 태양 빛을 받아 초록이 진해진다. 이웃이 전해준 부끄러운 듯 아련한 붉은 강낭콩에도 이 계절이 담겼다.

냉동실로 직행했던 강낭콩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계절이 선물하는 색들은 사랑한다. 마트에서 매일 보는 상추도 더 환하고 튼튼해 보인다.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그것들을 바라만 봐도 미소가 흐른다. 아직은 푸른 기가 남아있는 복숭아와 우리 집 단골인 수박, 조금 있으면 블루베리에 뒤지지 않는 포도를 만날 수 있다.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생긴다. 내가 그토록 멀리하고 싶은 강한 뙤약볕은 제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과일과 채소, 곡식의 훌륭한 양분이다. 그러니 올여름은 그런대로 이해하며 지내야겠다. 여름의 색을 바라보니 살며시 여유가 내 곁에 와 있다.  작은 것들이 나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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