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Jul 06. 2021

얼음 한 봉지

 

오전 9시 20분 그 시간이 돌아왔다. KF94 마스크로 단단히 감춰진 내 입을 거쳐 목과 나도 모를 깊은 곳에서 아우성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다. 정말 먹고 싶다. 지금 먹어야 해”라고 내게 소리친다.    

 

일주일에 3번 이상은 아침에 공원 걷기를 한다. 정확히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10분 전부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나만의 외침이다. 어제도 먹었는데 오늘은 그냥 건너뛸까 생각하다가도 아쉽고 허전하다. 

     

“우리 저기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씩 들고 가요. 내가 살게요.”

함께 하는 동네 친구에게 평소보다 5분 정도 일찍 운동을 끝내자고 얘기하고는 카페로 향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 8시 반이면 여는 프랜차이즈 카페는 벌써 몇 사람이 다녀간 모양이다. 익숙한 20대의 아르바이트 청년이  분주히 움직인다.   

두 잔을 받아 들었다. 긴 빨대에 입을 대고 얼른 빨아 마셨다. 답답해서 타들어 갈 것 같던 입술이 이제야 숨을 쉰다. 매해 돌아오는 여름이지만 올해는 유난이다 싶다. 아직 불볕더위가 시작된 것도 아니다. 아침 공기는 덥지만 참을만하다. 주변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음에도 차가운 그것을 찾는다. 내 몸의 에너지가 방전되었는지, 언제나 바닥을 드러내는 인내력의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아침마다 갈등의 시간이다.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갈지,  집으로 직행할 것인지 고민한다. 집에 커피가 있으니 얼음만 챙겨 두면 충분히 가능하다. 냉장고 얼음통에 얼음을 만들거나 마트에 있는 각얼음을 한 봉지 사두면 끝나는 일이었다. 매번 깜박하거나 귀찮아서 뒤로 미룬다.  

    

“커피 잘 마실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면 들고 온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 한잔이 하루를 책임진다. 식탁 위에 두고 오가는 길에 마시고 또 마신다. 커피를 마신다는 건 숨을 쉬는 일이다. 지금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잠깐 눈을 깜박여 보는 것과 같다.    

 

토요일이었다. 남편과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동네 마트에 들렀다. 갑자기 얼음이 생각났다.

“얼음 살까? 이것만 있음 아이스커피 매일 편하게 마시잖아.”

2000원을 주고  얼음 한 봉지를 샀다. 동네 카페 커피 한 잔 값이다. 얼음은 꽤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운, 횡재한 기분이다.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뜨거운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린 다음 각 얼음 일고여덟 개를 넣고 나만의 커피를 만들었다. 그러기를 삼일 째다. 


얼음이 뭐라고 부자가 된 느낌이다. 

“여보 기분이 참 이상하다. 얼음을 냉장고에 두고 있으니 완전히 편안해지네. 지금쯤이면 동네 카페 어디라도 가서 커피를 사 오고 싶잖아. 그 마음이 싹 사라졌어.”

신문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남편에게도 이 특별한 기분을 전했다.  

    

얼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두 달은 지났다. 필요했지만 무심했고 “다음에 사야지”라며 미뤄두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절실함이 사무치는 순간이 되었을 때야 집으로 들고 왔다. 바로 해결 가능함에도 내일을 기약하는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별일 아니지만  내 일상이 자세히 보였다. 속으로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마음에서 강한 미련과 욕구가 남아있어 꿈틀대지만 적극적으로 해법 찾기에는 거리를 두는 내가 있었다. 아주 간단한 것일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어렵고 힘든 산이 되어 버린다.  얼음이 내게 오기까지의 시간이 그랬다.  

간단하다 못해 ‘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한동안은 아이스커피를 소리 높여 찾는 일은 없을 듯하다. 잠깐 고개를 돌려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해결된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가능하다. 필요한 것을 가까이 둔다는 건 내가 원하는 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편리함을 선물한다.     

 

바느질로 끙끙대던 제로 웨이스트 수업을 다녀와서 시원한 갈색의 시원한 커피를 마셨다. 순간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를 잠시 잊는다. 서너 번 이상은 맛난 커피를 선물할 얼음이 냉동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당분간은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 색에 스며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