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를 먹으며 생각했다
“엄마 난 부드러운 황도가 좋아.”
“엄마 나도 황도.”
“그래? 난 아삭한 백도가 좋던데.”
나와 아이들의 취향이 너무나 선명하게 갈린다.
복숭아의 계절이다. 폭우와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복숭아는 익어가고 있었다. 마트에는 몇 개뿐이던 상자가 이제는 제법 많아졌다. 바로 옆 동네에서 따온 것이다. 그곳을 지나면서도 복숭아 밭을 본 적이 없는데 어디에 꼭꼭 숨었다 나왔는지 모르겠다.
오후에 8개가 든 복숭아 한 팩을 사 왔다. 치킨과 볶음밥으로 저녁을 먹고는 복숭아를 두고 아이들과 둘러앉았다. 난 이리도 튼튼할까 싶을 만큼 단단하면서도 쫄깃한 과육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정반대였다. 여름이 깊어질 무렵 나오는 주황색을 띠는 황도가 최고라 한다. 이건 부드럽다는 말에 과장을 더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 정도다.
황도는 아기의 포동포동 젖살 오른 뺨을 연상시킨다. 황도를 자르다 보면 손에 과즙이 흥건하고 모양도 잘 으스러진다. 먹기 전부터 나름의 진땀을 빼는 일이 쌓이다 보니 마음이 멀어진다.
이런 일들이 복숭아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끌리는 방향이 다를 때가 많다. 공통분모가 줄어든다는 건 생각을 표현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면 주부의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
일요일마다 거르지 않는 라면에도 두 아이의 선택이 다르다. 불닭볶음면을 좋아하는 큰아이와 부드러운 진라면 파인 막내로 나뉜다. 처음에는 통일해서 먹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은근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었다. 그건 잠깐 이었다. 아이들은 커 갈수록 먹는 일에서는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은 내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바라는 대로 시차를 두고 라면을 끓인다.
“엄마 번거롭게 두 개나 끓였어요. 고마워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는다. 가장 간편한 취향 존중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무엇이 좋다고, 원한다는 얘기를 별로 한 적이 없다.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 시대는 어려웠고 모두가 힘들게 살았다. 부모에게 힘이 되는 아이로 자라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 가지면서 커갔다.
겨울이었다. 피아노를 동네 먼 친척뻘 되는 아줌마에게 배웠는데 같이 다니는 언니가 빨간 점퍼를 입고 왔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의 옷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것과 같은 것을 사달라고 처음으로 엄마를 졸랐다.
내 간곡함이 통했는지 엄마는 어느 날 오일장에 가서 겨울 점퍼를 사 왔다. 내 앞에 놓인 짙은 분홍색 옷은 원하던 게 아니었다. 엄마는 크기가 맞으니 그냥 입으라 했다. 정말 입고 싶지 않았지만 교환하거나 다시 사러 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대로 입었다. 단골 외출복이었는데 걸칠 때마다 불편했고, 낡아 수명을 다할 때까지 정이 들지 않은 채 어색함만 머물다 갔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지만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 후로는 언니가 옷과 신발을 챙겨 주었다. 언니는 언제나 확실하고 빈틈없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골라주는 옷들이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이때부터 언니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면서도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싹텄다. 훗날 어른이 되어 내 것이 생기는 바탕이 되었다.
“너 뭐 먹고 싶어?”
“음 아무거나 괜찮아요.”
“정말 원하는 거 없어?”
“응 엄마 진짜야.”
아이와 옥신각신 하던 때가 있었다. 의견을 말하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아이로부터 분명히 무엇이 좋다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답답했고, 급기야는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고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일을 종종 겪으면서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고른 다음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차분히 채워진다는 사실을 어려 풋이 알게 되었다. 일이 년 전부터 가능한 범위에서 아이들이 소원하는 것에 손을 들어 주려 한다.
말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욕구가 받아들여지고 만족감을 느끼는 일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빛을 보게 된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여름 한 철에만 볼 수 있는 과일과 채소만큼은 아이와 남편의 얘기를 듣고 싶다. 참외와 포도를 좋아하는 큰아이, 복숭아와 수박이 최고인 막내, 옥수수를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 사이에서 시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